
신선조
주군에 대한 충의를 바탕으로 무사도를 추구한 막말 최강 조직.
신선조는 존왕양이 운동 세력과 불령 낭인을 단속하기 위해 막말에 만들어진 조직이다.
국장 곤도 이사미(こんどう いさみ), 부장 히지카타 도시조(ひじかた としぞう), 1번대 대장 오키타 소지(おきた そうじ) 등 검술 고수가 많이 소속됐다.
낭인과 농민의 모임에 불과했던 신선조가 어떻게 막말 최강의 조직이 되었고, 무엇을 생각하며 싸웠는지 되짚어보자.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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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로 상경하는 에도 막부 쇼군의 호위를 목적으로 결성된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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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다야 사건에서 반막부파 지사들을 다수 토벌하며 이름을 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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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에서 세력을 되찾으려던 조슈번을 막부군과 함께 진압. 활동을 인정받아 에도 막부의 가신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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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신정부군과 싸우지만 패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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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막부군이 신정부군에 항복하며 보신전쟁이 종결, 신선조도 해산
신선조 조직 연표
| 서기 | 사건 |
|---|---|
| 1862년 |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호위를 맡을 낭사 모집 시작 |
| 1863년 | 신선조의 모체인 미부 낭사조가 교토 황궁을 경비. 공로로 ‘신선조’라는 이름을 하사받음 |
| 1864년 | 이케다야 사건에 신선조 주력이 출동해 명성을 얻음 |
| 1865년 | 조슈번과 사쓰마번이 토막을 위한 밀약 ‘삿초 동맹’을 체결 |
| 1867년 |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을 상주 |
| 1868년 | 도바·후시미 전투에 구 막부군으로 참전. 곤도 이사미가 처형됨 |
| 1869년 | 신정부군의 총공격으로 히지카타 도시조도 전사. 신선조는 사실상 해산 |
신선조의 역사
신선조가 탄생한 건 에도 시대 말기, 이른바 막말이라 불리는 시기다.
막말은 개국을 해야 할지, 외국인을 배척해야 할지 정세가 소용돌이치던 불안정한 시대였다.
교토에는 도막 사상과 양이 사상을 가진 탈번 낭인이 넘쳐나, 기존의 치안 조직만으로는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치안이 악화된 교토에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とくがわ いえもち)가 상경하게 되면서, 쇼군 경호를 위한 낭사조를 모집한 것이 신선조의 시작이다.
미부 낭사조에서 신선조로, 탄생

곤도 이사미·히지카타 도시조·오키타 소지를 비롯한 도장 시에이칸(しえいかん)의 8명은 쇼군 경호를 맡는 낭사조에 참가했다.
그중 한 명인 기요카와 하치로(きよかわ はちろう)가 막부를 부정하고, 천황을 국가 권력의 정점에 둬야 한다는 근왕 사상을 가졌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낭사 단속 책임자와의 협의 끝에 곤도 일행은 일단 에도로 돌아가게 되지만, 곤도 이사미와 히지카타 도시조, 세리자와 가모 등이 중심이 되어 교토 잔류를 주장했다.
교토에 남은 낭사조는 ‘미부 낭사조’로 불렸다.
미부 낭사조는 교토 미부 마을의 야기 저택·마에카와 저택을 둔소로 삼아 대원을 모집했고, 36명 안팎의 집단으로 성장했다.
대원이 늘면서 ‘교토 슈고쇼쿠’를 맡은 아이즈번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まつだいら かたもり)의 후원을 받아, 시내 경비와 불령 낭인 단속을 맡게 된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미부 낭사조는 ‘신선조’로 이름이 바뀌었다.
신선조의 이름을 널리 알린 이케다야 사건

조슈번·도사번 등 존왕양이파 불령 낭인들이 교토 방화와 차기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とくがわ よしのぶ) 암살을 계획하고 있음을 알아낸 신선조.
이를 막기 위해 불령 낭인들이 묵고 있던 이케다야를 급습했다.
많은 불령 낭인을 토벌했지만 신선조도 무사하진 못해 중상을 입은 대원도 있었다.
중상자는 설이 갈리지만, 오키타 소지는 격전 중 객혈해 전선에서 이탈.
나가쿠라 신파치는 엄지 뿌리를 베는 중상, 도도 헤이스케도 이마를 베는 큰 부상을 입었다고 전해진다.
큰 희생을 낳은 이케다야 사건은 신선조의 이름을 단숨에 세상에 알렸다.
신정부군과 구 막부군의 전쟁이 시작! 보신전쟁

1867년,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조정에 정권을 반환하는 ‘대정봉환’을 시행하며 쇼군직을 내려놓았다.
조정이 ‘왕정복고의 대호령’을 발령하며 약 260년 이어진 에도 막부는 막을 내렸다.
요시노부는 형식상 정권을 반환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조정으로부터 정치 권한을 위임받은 상태가 이어졌다.
이에 납득하지 못한 도막파의 핵심, 사쓰마·조슈번은 반발을 강화한다.
요시노부는 구 막부군을 결성해 도막파인 신정부군과 보신전쟁을 시작했다.
신선조는 구 막부군으로 도바·후시미 전투에 참전했다. 정권을 되찾겠다며 기세 좋게 나섰지만, ‘니시키노 미하타(錦の御旗)’를 내건 신정부군은 정규군이었고, 맞서는 구 막부군은 역적으로 취급될 처지가 된다.
신정부군은 영국에서 들여온 총과 대포를 사용했지만, 구 막부군은 칼로만 맞서 대패했다.
다만 전쟁은 에도성 무혈개성·우에노 전쟁·나가오카 전투·아이즈 전쟁 등으로 1년 이상 이어진다.
고요 진부타이로 개칭

구 막부의 명령으로 신선조는 ‘고요 진부타이(甲陽鎮撫隊·こうようちんぶたい)’로 이름을 바꿨다.
곤도 이사미는 에도에서 신정부군과 싸우다 이타바시주쿠에서 체포되어 이타바시 형장에서 참수, 교토에서 효수됐다.
오키타 소지는 건강 악화로 활약하지 못했고 도바·후시미 전투에도 참가하지 못한 채 요양하다가 에도 센다가야에서 병사했다.
신선조, 최후의 땅

근대식 무기를 쓰는 신정부에 밀려 구 막부군과 고요 진부타이는 결국 홋카이도 하코다테에 이른다.
하코다테의 고료카쿠를 거점으로 에노모토 다케아키(えのもと たけあき) 등 구 막부 신하들이 임시정부를 세워 관군에 저항했다.
고료카쿠는 일본에서도 드문 별 모양 요새로, 히지카타 도시조 등 신선조의 최후의 땅이 됐다.
히지카타 일행이 이끄는 구 막부군은 벤텐다이바에서 마지막 결전을 맞는다.
이폰기 관문 근처 전투 중 히지카타 도시조는 말 위에서 총탄을 맞아 35세의 나이로 숨졌다.
하코다테 전쟁에서 구 막부군이 패배하며 보신전쟁은 종결.
국내는 신정부에 의해 통일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다.
신선조의 멤버

곤도 이사미·히지카타 도시조·오키타 소지를 비롯한 ‘시에이칸(しえいかん)’의 8명이 중심이 되어 신선조를 조직화하고 강하게 만들었다.
국장은 곤도 이사미, 부장은 히지카타 도시조, 1번대 대장은 오키타 소지였다.
신선조는 1번부터 8번까지의 조로 나뉘었고, 각 조는 5명 편성. 간부인 부장조근이 각 조를 이끌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름을 남긴 국장 곤도 이사미와 부장 히지카타 도시조를 소개한다.
다른 멤버가 궁금하다면 꼭 찾아보길 바란다.
국장·곤도 이사미
곤도 이사미는 에도 시대 말기의 무사이자 신선조 국장. 덴넨 리신류 4대 종가다.
1833년, 무사시국 다마군(현재의 조후)에서 농민 미야가와 가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이름은 가쓰고로. 중류층 상위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15세에 가쓰고로는 덴넨 리신류의 도장 시에이칸에 입문했다.
검술 실력을 키워 도장 주인 곤도 슈스케에게 인정받는다.
입문 다음 해에 면허개전.
곤도 슈스케의 양자가 되어 곤도 이사미를 칭하게 되었고, 시에이칸을 이었다.
이후 교토로 상경해 미부 낭사조를 거쳐 신선조를 결성, 국장이 된다.
곤도 이사미는 어릴 때부터 대담한 성격으로 여러 무용담이 전해진다.
또한 무사에 대한 강한 동경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부장·히지카타 도시조
1835년, 무사시국 다마군 이시다마을(현재 도쿄도 히노시)에서 태어났다.
본가는 ‘오다이진’이라 불리던 호농 가문으로 10남매의 막내였지만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 둘째 형의 아내 ‘나카’에게 자랐다.
히지카타 도시조는 집안 비전 약인 이시다 산야쿠를 행상하며 각지의 검술 도장에서 실력을 갈고닦았다. 누나의 남편 사토 히코고로가 시에이칸에 소속되면서 자택에 도장을 마련했고, 그곳에 검술을 가르치러 온 사람이 곤도 이사미였다.
‘무사가 되고 싶다’ ‘도쿠가와 쇼군가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통하며 의형제를 맺는다.
이후 덴넨 리신류에 정식 입문.
훗날 신선조 1번대 대장이 되는 오키타 소지를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그 뒤 곤도 이사미와 함께 상경해 신선조 부장이 된다.
다혈질에 거친 성미로 어릴 때부터 여러 사건을 일으켜 ‘바라가키(난폭자)’라 불렸다.
하지만 그와 달리 전략가적인 면모도 있었고, 그 능력으로 곤도 이사미를 뒷받침했다.
신선조 멤버들이 남긴 명언
위인이나 시대에 이름을 남긴 인물의 말은 지금도 마음을 울린다.
신선조 국장 곤도 이사미와 히지카타 도시조의 명언을 소개하자.
곤도 이사미의 명언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은혜.
버려서는 안 될 것은 의리.
사람에게 줄 것은 인정.
되풀이하면 안 될 것은 과실.
끝까지 내세우면 안 될 것은 아집.
웃어서는 안 될 것은 남의 실패.
들어서는 안 될 것은 남의 비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신용.」
무사를 동경하고 무사로 살다 무사로 죽은 곤도 이사미다운 말이다.
사람을 대하는 데 중요한 건 막말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지도 모른다.
히지카타 도시조의 명언
거칠고 싸움을 좋아하는 성격이면서도 하이쿠를 취미로 삼았던 히지카타 도시조.
그 말에는 격렬한 사상뿐 아니라 강한 미의식도 느껴진다.
「남자의 일생은 아름다움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하루가 지나면 그 하루는 잊으려 한다. 과거는 내게 아무 의미도 없다. 싸움이란 시작할 때 이미 목숨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긴다. 어제의 석양을 오늘도 볼 수 있는 식으로 세상은 만들어지지 않은 모양이다. 세상살이에 싫증 난 자만 따라와라.」
「설령 내 몸이 에조의 섬에서 썩어 사라진다 해도, 내 영혼은 일본을 지켜나간다」
「창을 잡고 달을 올려다볼 때마다 생각한다. 내일은 내가 시신이 되어, 그 시신을 달이 비추게 되지 않을까 하고」
신선조가 남긴 일화
신선조의 의외의 면모가 보이는 에피소드를 몇 가지 소개한다.
여기서 다루지 못한 흥미로운 일화도 많으니, 신선조에 관심이 생겼다면 꼭 찾아보길 바란다.
적보다 아군을 더 베었다
적보다 아군을 더 많이 베었다고 전해지는 신선조.
이유는 신선조 규약인 ‘사도(士道)’에 따라, 적을 앞에 두고 등을 보이는 등 무사답지 않은 행동을 한 자는 즉시 처형했기 때문이다.
또한 멋대로 탈퇴해 옛 동료에게 숙청당한 경우도 많았다.
대식가 국장과 인기남이었던 부장
국장 곤도 이사미는 단것을 좋아하는 대식가로, 토로로밥을 19그릇이나 먹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부장 히지카타 도시조는 히노의 지인에게 수많은 러브레터와 ‘자신이 얼마나 인기 있는지’를 자세히 적은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고 한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은 일상부터 남달랐다.
귀여운 면도 있었던 곤도 이사미
곤도 이사미는 ‘삼국지’와 ‘수호전’의 팬이었다.
특히 관우 운장의 열혈 팬으로, 어릴 때 아버지에게 “관우는 아직 살아 있어?”라고 물었다가 “붙잡혀 처형됐다”는 답을 듣고 큰 소리로 울었다고 한다.
농가 출신인 곤도 이사미는 농사 외에는 검술만 해왔기에, 국장이 된 뒤 글을 읽고 쓰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밤마다 대원들의 눈을 피해 유명 인물의 글씨를 본떠 연습했다. 참고로 오키타는 글씨를 잘 썼다.
신선조와 인연이 있는 건물
신선조와 인연이 있는 건물과 스폿을 소개한다.
신선조에 관심이 생겼다면 꼭 한 번 들러보자.
히노주쿠 혼진
‘혼진’은 에도 시대 숙박 마을에 있던 숙소를 말한다. 150년 이상 전에 지어진 역사적 건물 내부에서는 에도 시대 건축 문화를 둘러볼 수 있고, 전시 코너에서는 대대로 전해 내려온 귀중한 자료를 감상할 수 있다. 신선조 관련 자료도 다수 전시한다.
구로다니 곤카이코묘지
‘구로다니상’이라는 애칭으로 사랑받는 정토종의 대본산. 막말에 교토 슈고쇼쿠로 임명된 아이즈번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가 본진을 둔 절로, 곤도 이사미·히지카타 도시조 등을 휘하에 둔 데서 신선조 발상지로도 알려져 있다.
다카하타 후도손
간토 3대 부동 중 하나로 꼽히는 진언종 지산파의 별격 본산 사원. 신선조 부장 히지카타 도시조의 보리사이기도 하다.
경내 약 4천 평, 인접한 산림까지 합치면 3만 평에 달하는 넓은 부지로, 경내에는 ‘후도도’, 금강역사상이 좌우에 모셔진 ‘니오몬’, 총중량 1100Kg을 넘는 거상 ‘조로쿠 후도 삼존’ 등 귀중한 문화재·사보가 약 2만 점 있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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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조 복장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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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도 이사미의 도장 ‘시에이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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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일어난 여관(하타고)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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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조가 끝까지 사용한 칼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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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조의 마지막 거점, 고료카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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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조 국장 곤도 이사미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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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조 멤버 이미지
신선조 개요
- 창설
- 1863년
- 해산
- 1869년
- 인원
- 24명~230명
- 발족 장소
- 교토부 교토시
- 국장
- 곤도 이사미(こんどう いさみ)
- 부장
- 히지카타 도시조(ひじかた としぞ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