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모토 료마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さかもと りょうま)는 에도 막부에서 천황에게 권력이 돌아가게 되는 계기를 만든 인물이다.
사카모토 료마가 큰일을 해낼 수 있었던 건, 입장이 다른 사람의 말도 제대로 듣고 좋은 점을 흡수하는 유연한 사고를 지녔기 때문이다.
많은 이가 불가능하다고 여긴 일도 성공시킬 실행력과 새로운 시대에 대한 명확한 비전, 그리고 폭넓은 인맥을 갖추고 있었다.
‘세계로 나가고 싶다’는 자신의 꿈을 향해 움직인 위인·사카모토 료마를 소개해 보자.

포인트

  • 사쓰마번과 나가사키의 호상에게 도움을 받아, 일본인 최초의 상사 ‘가메야마 샤추(亀山社中)’를 설립
  • 사쓰마·조슈 사이에 거래를 제안해 ‘삿초 동맹(薩長同盟)’을 성립
  • 막부가 조정에 정권을 돌려주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제안해 에도 시대를 끝내는 계기를 만들었다

사카모토 료마 인물 연표

서기 사건
1836년 고치에서 고시(郷士)·사카모토 야헤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남.
1853년 검술 수련을 위해 미조부치 히로노조와 함께 에도로 출발.
1863년 고베에서 가쓰 가이슈의 해군 학원 ‘해군주쿠’의 주쿠토(塾頭)가 됨
1865년 사쓰마번의 보호 아래, 나가사키에 ‘가메야마 샤추’를 결성
1866년 삿초 동맹 성립. 데라다야에서 습격을 받아 부상했으나 탈출.
1867년 도사번의 보호 아래 ‘도사 해원대’ 대장이 되지만, 교토 오미야에서 나카오카 신타로와 함께 암살당함

사카모토 료마의 생애

막말의 지사 사카모토 료마. 삿초 동맹을 중재해 대정봉환으로 이어지게 하며 근대 일본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31년의 짧고도 강렬한 생애를 소개한다.

하급 무사의 막내로 태어나다

사카모토 료마 동상으로 유명한 고치현 가쓰라하마
사카모토 료마 동상으로 유명한 고치현 가쓰라하마

1836년 11월 15일, 고치성 근처 혼마치에서 사카모토 료마는 태어났다.
부모 사이에는 이미 4명의 형제자매가 있었고, 료마는 막내였다.
사카모토가의 본가는 ‘사이타니야’라는 상가였고, 료마의 집안은 그곳에서 분가해 고시의 지분을 취득한 고요닌 집안이었다.

료마가 12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이후 두 번째 어머니에게 교육을 받는다.
료마와 셋째 누나는 두 번째 어머니의 첫 혼인처였던 가와시마가에 자주 놀러 갔고, ‘유럽’이라는 별명이 있던 가와시마 이사부로(かわしま いさぶろう)에게서 세계 이야기를 들었다.

14살에는 히네노 도장에 입문해 오구리류 검술 등을 배우기 시작했고, 빠르게 실력이 늘어 19살에 에도로 검술 수련을 떠났다.

양이 사상을 고치고, 세계로 눈을 돌린 청년기

세계로 눈을 돌리는 사카모토 료마의 이미지
세계로 눈을 돌리는 사카모토 료마의 이미지

검술 수련을 위해 1853년 고치를 떠난 료마는, 에도 3대 도장 중 하나인 홋신 잇토류(北辰一刀流) 치바 사다키치 도장에 입문했다.
같은 해, 페리가 이끄는 흑선 4척이 우라가에 내항했고 사카모토 료마도 시나가와 연안 경비에 동원됐다.

수련을 마친 뒤 1년 후 귀향해 겨울에 가와다 쇼료(かわだ しょうりょう)를 찾아갔고, 세계와 대등하게 교류하려면 일본에는 큰 배와 이를 움직일 인재가 필요하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외국인을 몰아내고 외교를 거부하는 ‘양이(攘夷)’가 잘못이라는 걸 깨달았다.

1861년, 27살이 된 사카모토 료마는 친척이자 절친이기도 한 다케치 스이잔(たけち すいざん)이 이끄는, 도사번이 결성한 정치 조직 ‘도사 근왕당’에 가입한다.

이듬해 다케치 스이잔의 밀서를 들고 구사카 겐즈이(くさか げんすい)를 찾아가 ‘지금은 다이묘도 공경도 믿을 수 없고, 이제는 민간 사람들이 일어서야 한다’는 말을 듣고 도사로 돌아간 뒤 다음 달에 탈번했다.

같은 해 에도로 나가, 막부의 군함봉행병(軍艦奉行並) 가쓰 가이슈(かつ かいしゅう)의 제자가 됐다.
이후 가쓰 가이슈는 막부로부터 오사카만 주변 경비를 명받았고 그 일환으로 고베에 해군조련소를 건설한다.
사카모토 료마도 동행해 조련소에 병설된 가쓰 가이슈의 사숙에 입문했다. 그곳에서 가쓰 가이슈의 오른팔로 일하면서 해군 수련에 힘썼다.
1864년에는 가쓰 가이슈의 사자로서 사이고 다카모리(さいごう たかもり)를 만났다.

일본 최초의 상사 설립

사카모토 료마가 설립한 가메야마 샤추 터
사카모토 료마가 설립한 가메야마 샤추 터

가쓰 가이슈의 제자가 되어 순탄해 보이던 사카모토 료마에게 사건이 잇따라 일어난다.
1864년, 교토에서 이케다야 사건이 발생.
이케다야에 모인 과격한 존왕양이 지사들이 신선조의 곤도 이사미(こんどう いさみ) 등에 의해 일망타진됐다.
같은 해 7월에는 조슈번과 아이즈번·사쓰마번의 전투인 ‘금문의 변(禁門の変)’이 일어나 조슈번이 패배한다.

이케다야 사건과 금문의 변 모두, 반막부 세력인 존왕양이 측으로 조련소 학생들이 참가했다.
막부의 분노를 산 가쓰 가이슈는 에도로 소환되고, 조련소와 가쓰주쿠도 폐쇄된다.
사카모토 료마 등 탈번 낭인은 갈 곳을 잃었지만, 사쓰마번의 보호 아래 나가사키에서 해운업·항해술 수련 등을 하는 ‘가메야마 샤추(亀山社中)’라는 상사를 만들었다.

1866년, 가메야마 샤추의 힘으로 사이가 나빴던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손을 잡는 삿초 동맹을 성사시켰다.
이로써 막부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이 탄생했다.
이를 기획한 사카모토 료마는 막부로부터 위험인물로 표적이 된다.

삿초 동맹 성립 이틀 뒤, 후시미의 데라다야에 묵고 있던 사카모토 료마는 후시미 봉행소 관리들의 급습을 받았다.
하지만 데라다야에서 일하던 오료의 기지와 조후번사 미요시 신조(みよし しんぞう)의 도움으로 사쓰마번 저택으로 피신했다.
양손 엄지 등에 깊은 상처를 입은 료마는 사쓰마번 저택에서 오료의 간호를 받았고 이후 오료와 결혼했다.
사이고 다카모리와 고마쓰 다테와키(こまつ きよかど)의 권유도 있어, 사쓰마의 기리시마산으로 상처 치료를 겸한 신혼여행을 떠났다.

대정봉환 제안

대정봉환이 이뤄진 전 이궁 니조성 세이류엔
대정봉환이 이뤄진 전 이궁 니조성 세이류엔

1866년, 에도 막부와 조슈번의 전쟁인 막장 전쟁(幕長戦争)이 일어난다.
가메야마 샤추는 조슈번을 돕기 위해 사쓰마번 명의로 구입한 유니온호로 참전했다.
또 사카모토 료마는 에조 개척, 시마네현 앞바다 다케시마 개척을 구상하며 경제인으로서의 역량도 보였다.
이 사카모토 료마를 주목한 것이 도사번이었다.

사쓰마번과 조슈번에 뒤처진 도사번의 실권자였던 참정 고토 쇼지로(ごとう しょうじろう)가 나가사키에서 사카모토 료마와 회담한다.
도막을 노리던 사카모토 료마는 도사번을 끌어들이는 것이 유리하다고 보고, 고토 쇼지로와 손잡아 도사번에 복귀했다.
이에 따라 가메야마 샤추는 ‘해원대’로 이름을 바꾸고 도사번 조직이 되었으며, 사카모토 료마는 해원대 대장에 취임한다.

사쓰마번과 조슈번은 무력 도막을 생각하기 시작했지만, 도사번은 이를 피하고 싶어 사카모토 료마에게 계책을 구했다.
사카모토 료마는 고토 쇼지로에게 도사번 배 ‘유가오’ 안에서 대정봉환을 담은 8가지 방안을 제안했다.
이것이 ‘선중 팔책(船中八策)’으로 불린다.

고토 쇼지로는 이를 전 도사번주 야마우치 요도(やまうち ようどう)에게 건의했고, 야마우치 요도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とくがわ よしのぶ)에게 대정봉환을 제안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이를 받아들여 정권을 조정에 반납했다.

사카모토 료마는 대정봉환 1개월 뒤인 11월 15일, 31세 생일에 교토 오미야에서 암살당했다.
암살의 실행범은 반막부를 단속하던 조직 ‘미마와리구미(見廻組)’ 설이 유력하지만, 진상은 아직도 미궁이다.

사카모토 료마의 명언

삿초 동맹 중재에서 대정봉환으로 이어지게 하고, 일본 최초의 상사를 세워 메이지 유신에 큰 영향을 준 사카모토 료마의 명언을 소개한다.

논쟁에서 이겨도, 사람의 삶은 바꿀 수 없다

논쟁에서 이겨도 상대의 명예만 빼앗을 뿐.
사람은 논쟁에서 져도 자신의 신념이나 삶의 방식은 바뀌지 않는 존재이고, 진 뒤에 남는 건 원망뿐이라는 말이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세상을 바꾼 사카모토 료마다운 한마디다.

사람이란 어떤 경우에도, 좋아하는 길·잘하는 길을 버려서는 안 된다.

무엇을 해야 할지 망설일 때는 ‘좋아하는 것·몰입할 수 있는 것·뜻이나 꿈을 품을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는 명언.

내 안에 동기가 있어야, 잘하기 위한 노력을 노력이라 느끼지 않고 높은 벽도 넘을 수 있다고 료마는 알고 있었다.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
내 마음에 솔직해지는 것의 소중함을 다시 느끼게 해준다.

비가 온다고 해서 달릴 필요는 없다. 달려도 앞은 비다.

비가 온다고 무리해서 달리지 말고, 비를 피하며 다음 수를 생각하다가 잠든다.
다음 날 떠오른 계책을 과감히 해본다.
그런 사이클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하고 싶은 걸 하되, 무리하지 않고 조급해하지 않으며 다시 시도한다’는 사카모토 료마의 행동 지침이 담긴 말이다.

사카모토 료마의 일화

명언과 함께, 사카모토 료마의 성격이 보이는 일화를 소개한다.

막말의 오줌쟁이

사카모토 료마는 어릴 때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상하게도 늘 현관문 앞에서 서서 소변을 봤다고 한다.
또 13살이 되어도 이불에 오줌을 쌌다고 한다.
위인은 기인과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걸 새삼 느끼게 하는 에피소드다.

울보·왕따였던 어린 시절

어린 시절 일화는 이불에 오줌만이 아니었다.
울보에 괴롭힘을 당하던 사카모토 료마는, 학원에 들어가도 곧 그만두게 됐다고 한다.
일본 역사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이라기엔 의외의 어린 시절이지만, 도량도 체격도 큰 누나에게 단련되고 도장에서 유술과 검술을 익히고 여러 사람을 만나며, 큰 변혁을 가져오는 인물로 바뀌어 갔다.
사람은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는 에피소드다.

일본 최초의 신혼여행

데라다야 사건으로 부상당한 사카모토 료마는 신혼의 아내와 함께 가고시마현 온천마을로 요양 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이 일본 최초의 신혼여행으로 알려져 있다.
또 료마가 만든 ‘가메야마 샤추’는 일본 최초의 주식회사로도 불린다.

이처럼 기존 상식에 얽매이지 않는 발상과 실행력이 있었기에 일본 역사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카모토 료마와 인연이 있는 건물

사카모토 료마와 인연이 있는 성과 건물, 관광 스폿 3곳을 소개한다.

가쓰라하마

고치시 우라도반도 끝에 위치한 해안으로, 류토미사키와 류오미사키 사이에 활 모양으로 펼쳐진다. 소나무 숲과 백사장, 바다가 아름다운 절경 명소. 고치현을 대표하는 관광 명소 중 하나로, 에도 시대 말기에 활약한 사카모토 료마의 대형 동상이 있어 인기다.

고치현립 사카모토 료마 기념관

사카모토 료마 기념관에서는 사카모토 료마의 생애와 막말 역사를 음성·애니메이션 등을 통해 즐겁게 배울 수 있다.
명공 12대 사카이다 가키에몬이 만든 사카모토 료마 상, 료마가 쓰던 것과 같은 형태의 권총 등 귀중한 전시도 많다.

나가사키시 가메야마 샤추 기념관

노후화된 유구를 당시와 가까운 상태로 개수·복원해, 헤이세이 21(2009)년부터 공개.
입구에는 ‘가메야마 샤추 터’ 비석이 서 있다.
관내에는 료마의 애용품이었던 부츠와 권총, 편지 복제품, 월금, 가메야마 샤추 지사들의 사진 등 연고품을 전시한다.

사진

  • 사카모토 료마의 이미지

    사카모토 료마의 이미지

  • 사카모토 료마 동상으로 유명한 고치현 가쓰라하마

    사카모토 료마 동상으로 유명한 고치현 가쓰라하마

  • 세계로 눈을 돌리는 사카모토 료마의 이미지

    세계로 눈을 돌리는 사카모토 료마의 이미지

  • 사카모토 료마가 설립한 가메야마 샤추 터

    사카모토 료마가 설립한 가메야마 샤추 터

  • 대정봉환이 이뤄진 전 이궁 니조성 세이류엔

    대정봉환이 이뤄진 전 이궁 니조성 세이류엔

  • 시오히타시 온천 료마 공원 료마와 오료의 인연 맺기 족욕

    시오히타시 온천 료마 공원 료마와 오료의 인연 맺기 족욕

사카모토 료마 프로필

이름
사카모토 료마
출생
1836년
사망
1867년
향년
31세
출생지
도사번(현재의 고치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