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로마치 시대

1336년부터 1573년까지 200년 넘게 이어진 무로마치 시대.
전반은 남북조 시대, 후반은 전국 시대로 나뉘기도 할 만큼 오랜 기간 다양한 사건이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무로마치 시대에 일어난 사건과 그 시대에 융성한 문화를 함께 되짚어봅시다.

포인트

  • 무로마치 막부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귀족 사회에서도 큰 권력을 쥔다
  • 쇼군 후계자 다툼에 각지의 슈고 다이묘가 가세하며 11년간 이어진 오닌의 난이 일어난다
  • 오닌의 난으로 막부와 슈고 다이묘의 권위가 떨어지고 무사·농민이 잇키를 일으킨다
  • 각지에서 힘을 키운 센고쿠 다이묘가 영지를 두고 다투며 전국 시대로 돌입한다
  • 오다 노부나가가 부상해 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고 교토로 입성한다
  •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추방되며 무로마치 막부가 멸망한다

무로마치 시대의 흐름

무로마치 시대 전반인 ‘남북조 시대’는 조정이 남조와 북조로 갈라진 데다 막부도 내부 분열을 겪으며 혼란이 극심했던 시기입니다.
그 속에서 막부와 조정이 힘을 잃고, 대신 각지의 유력자와 농민·무사가 세력을 키우면서 하극상의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하극상의 시대에 권력과 영토를 얻은 ‘센고쿠 다이묘’들이 더 많은 땅을 노리고 빼앗고 빼앗기며, 유명한 ‘전국 시대’로 들어가게 됩니다.
무로마치 시대의 큰 사건을 중심으로 흐름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함께 살펴봅시다.

막부의 멸망과 탄생의 계기가 된 고다이고 천황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상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상

가마쿠라 시대 중기부터 다이카쿠지토(大覚寺統)와 지묘인토(持明院統)라는 두 황통(천황의 혈통)이 번갈아 천황을 맡도록 가마쿠라 막부가 강제했습니다.
하지만 양쪽 모두 자신이 정통이라고 여겼기에 가마쿠라 막부에 대한 불만이 커져 갔습니다.

다이카쿠지토 계열의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은 자신의 자손을 천황으로 세우고자 했고, 마침내 거병해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켰습니다.
도막에는 성공했지만, 귀족을 우대하는 정치에 불만을 품은 무장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가 거병하면서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고다이고 천황은 패배합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지묘인토의 고묘 천황(光明天皇)을 옹립해 무로마치 막부를 열면서 무로마치 시대가 시작됩니다.

조정과 막부의 분열로 혼란이 극에 달한 시대

무사의 이미지
무사의 이미지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패해 요시노로 도망친 고다이고 천황은 포기하지 않고 정통성을 주장하며 요시노에 조정을 엽니다.
지묘인토의 고묘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교토의 ‘북조’와, 다이카쿠지토의 고다이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남조’라는 두 조정이 동시에 존재했던 무로마치 시대 전반을 ‘남북조 시대’라 부릅니다.

남북조 시대에는 조정뿐 아니라 막부도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足利直義)의 대립으로 두 파벌로 갈라지며 내부 분열이 심해졌습니다.

조정과 막부가 각각 둘로 나뉘어 대립하면서, 막부와 무사단을 잇던 주종 관계가 무너집니다.
무사단은 자신의 토지를 지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집단으로 변해 갔고, 무사단끼리도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알기 어려운 상황이 됐습니다.

혼란스러운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막부는 유력 무사를 지역 지배자인 ‘슈고’로 파견했습니다.
지역 통치를 위해 슈고의 권한과 권력을 강화하면서, 이들은 ‘슈고 다이묘’로 성장합니다.

지역의 혼란이 가라앉고 막부의 힘이 커질수록 남조와 북조는 약해졌습니다.
무로마치 막부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가 약해진 남조와 북조를 통합하면서 남북조 시대는 막을 내립니다.

절대적인 권력을 손에 넣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세운 금각사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세운 금각사

아시카가 가문의 지위를 굳히기 위해 요시미쓰는 힘이 지나치게 커진 슈고 다이묘 토벌에 나섭니다.
36세에 아들 아시카가 요시모치(足利義持)에게 쇼군 자리를 물려주지만, 이후에도 실권은 계속 쥐고 있었습니다.
귀족 최고위인 태정대신에 오르고, 불교 세력에도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 출가하는 등 다방면에서 막강한 권력과 영향력을 손에 넣습니다.
그 권력을 바탕으로 일명 무역을 시작해 막대한 무역 이익도 얻었습니다.

요시미쓰는 문화에도 큰 영향을 남겨 금각사로 대표되는 기타야마 문화를 꽃피웠고, 간아미·제아미 등을 후원해 사루가쿠 발전에도 기여했습니다.

후계 문제, 전국을 휩쓴 전란으로

오닌의 난 발발지 ‘가미고료 신사’
오닌의 난 발발지 ‘가미고료 신사’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에게는 후계자가 될 아이가 없었습니다.
차기 쇼군으로 세우기 위해 동생 아시카가 요시미(足利義視)를 양자로 들였지만, 아내 히노 도미코(日野富子)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고 맙니다.

요시마사는 아들 아시카가 요시히사(足利義尚)로 후계를 바꾸겠다고 발표합니다.
차기 쇼군 후보였던 요시미는 당연히 반대하며 요시마사·요시히사와 대립합니다.
아시카가 가문의 후계 문제에 슈고 다이묘의 세력 다툼까지 얽히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요시미와 슈고 다이묘 호소카와 가쓰모토(細川勝元)를 중심으로 한 동군, 요시히사와 야마나 소젠(山名宗全)을 중심으로 한 서군으로 갈린 싸움 ‘오닌의 난’으로 번집니다.
각지의 슈고 다이묘도 동군·서군에 각각 합류하며 대규모 전쟁이 11년이나 이어졌습니다.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야마나 소젠의 사망, 그리고 요시미와 요시히사의 화해로 오닌의 난은 종결됩니다.
11년간의 전쟁으로 교토는 폐허가 되었고, 무로마치 막부와 슈고 다이묘의 권위도 추락했습니다.
대신 지역의 유력 무사들이 권위와 힘을 키워 갑니다.

각지에서 잇키가 속출! 퍼져가는 하극상의 흐름

야마시로국 잇키 종언의 땅
야마시로국 잇키 종언의 땅

오닌의 난으로 무로마치 막부와 슈고 다이묘에 불만을 품은 농민들은 연공 경감과 빚 탕감을 요구하는 도 잇키(土一揆)를 일으킵니다.
도 잇키의 규모와 요구는 해마다 커져, 슈고 다이묘의 지배권을 빼앗는 구니 잇키(国一揆)로 발전합니다.
야마시로국 잇키(山城国一揆)에서는 슈고 다이묘 하타케야마 씨(畠山氏)가 나라에서 쫓겨나고, 무사와 농민이 자치적으로 지배하는 체제가 실현되었습니다.

잇키가 성과를 내면서 막부가 임명한 슈고 다이묘가 나라를 다스리던 기존 체계는 붕괴합니다.
병력과 재력을 모을 수 있는 자가 권력을 쥐는 약육강식의 시대가 시작됐습니다.

전국 시대의 개막과 오다 노부나가의 부상

현재는 공원이 된 오케하자마 전장
현재는 공원이 된 오케하자마 전장

하극상으로 권력과 영토를 얻은 센고쿠 다이묘, 각지에서 힘을 키우던 슈고 다이묘, 종교 세력까지 가세하며 영토를 둘러싼 전쟁이 이어지는 ‘전국 시대’가 시작됩니다.

전국 시대에는 수많은 센고쿠 다이묘가 영토 다툼을 이어갔지만, 그중 한 명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두각을 드러냅니다.

스루가(현재의 시즈오카)의 다이묘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가 교토로 향하던 과정에서 노부나가의 영지로 쳐들어오며 ‘오케하자마 전투’가 벌어집니다.
오다 군은 4천 명뿐이었지만, 총대장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겨냥한 치밀한 계략으로 2만5천 명에 달하는 이마가와 군에 승리합니다.
오케하자마 승리로 오다 노부나가의 이름은 각지에 알려지게 됩니다.

센고쿠 다이묘들이 전쟁에 몰두하던 시기, 무로마치 막부는 당시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義輝)가 살해되어 쇼군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요시테루의 동생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는 막부 재흥을 위해 각지 다이묘에게 지원을 요청합니다.

그 요청에 응한 무장이 바로 오다 노부나가였습니다.
천하 통일을 목표로 한 노부나가는 교토 지배가 중요하다고 봤고, 요시아키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집니다.
막부 부흥을 내세워 노부나가는 서쪽으로 세력을 넓혀 갔습니다.

노부나가보다 강한 세력을 가진 센고쿠 다이묘도 많았고, 특히 다케다 신겐(武田信玄)과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은 전국 시대 최강으로 불렸습니다.
다만 두 사람의 싸움은 오랫동안 결판이 나지 않아, 노부나가에게까지 힘을 돌릴 여유가 없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에 의한 무로마치 막부의 멸망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추방된 도모노우라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추방된 도모노우라

세력을 계속 확장한 오다 노부나가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해 교토로 입성합니다.
요시아키는 무로마치 막부 15대 쇼군이 되고, 노부나가는 무로마치 막부라는 후원을 얻게 됩니다.
막부를 재흥하려는 요시아키와 천하 통일을 원하는 노부나가는 방향성 차이로 점차 대립하게 됩니다.

요시아키는 여러 다이묘와 불교 세력(엔랴쿠지·혼간지) 등을 연합시켜 포위망을 만들고 노부나가를 쓰러뜨리려 하지만 실패합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노부나가 타도를 꾀하지만, 끝내 노부나가에 의해 추방되며 무로마치 막부는 멸망했습니다.

무로마치 시대의 문화

무로마치 시대의 문화는 아시카가 요시미쓰 재위기에 꽃핀 ‘기타야마 문화’, 아시카가 요시마사 재위기에 번성한 ‘히가시야마 문화’로 나뉩니다.
해외와의 교역으로 대륙 문화가 전해지자 무가가 귀족 문화·대륙 문화를 융합해 새로운 무가 문화를 꽃피워 갔습니다.

귀족·무가·선종 문화가 융합된 ‘기타야마 문화’

기타야마 문화를 대표하는 건축물 ‘금각사’
기타야마 문화를 대표하는 건축물 ‘금각사’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별장 기타야마도노를 중심으로 번성한 ‘기타야마 문화’.
귀족 주거 양식에 ‘무가의 풍격’과 ‘선종의 차분함’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기타야마도노는, 기타야마 문화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타야마도노는 금각사로 이름을 바꿔 오늘날에도 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가마쿠라 시대에 일본으로 들어온 산과 물 등 자연을 소재로 한 산수화를 바탕으로, 먹을 물에 풀어 농담과 번짐이 특징인 수묵화가 기타야마 문화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또한 사루가쿠 연희자였던 간아미와 제아미의 활약으로 노·교겐이 더 발전한 것도 기타야마 문화의 특징입니다.

선의 특징이 다양한 문화에 드러난 ‘히가시야마 문화’

히가시야마 문화를 대표하는 건축물 ‘은각사’
히가시야마 문화를 대표하는 건축물 ‘은각사’

히가시야마 문화는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만든 은거처 ‘히가시야마 산소’를 중심으로 발전했습니다.
귀족·무가·선종 문화가 융합된 기타야마 문화를 바탕으로, 선의 색채를 더 강하게 한 ‘히가시야마 문화’.
선의 ‘소박함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정신과 일본 미의식인 와비(한적한 멋)·유겐(깊은 여운)을 담아낸 히가시야마 산소는 에도 시대에 은각사로 이름을 바꿔 현재 일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기타야마 문화에서 태어난 수묵화는 중국에서 그림을 배운 셋슈(雪舟)가 더 발전시켜 일본 고유의 수묵화를 완성했습니다.
셋슈의 대표작으로는 ‘사계산수도’ ‘추동산수도’ ‘아마노하시다테도’가 있으며 국보로 지정돼 있습니다.

또한 다인 무라타 주코(村田珠光)에 의해 와비 정신을 중시한 ‘와비차’라 불리는 다도가 등장했습니다.
일본 전통 문화인 다도의 기초는 히가시야마 문화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돌 배치와 지형의 높낮이로 산수의 정취를 표현한 ‘가레산스이(枯山水)’ 정원도 이 무렵 조성되었습니다.

무로마치 시대의 흥미로운 에피소드

수많은 위인이 활약한 무로마치 시대에는 재미있는 일화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농민·무사의 힘이 커지면서 서민들도 조금씩 여유로워졌고, 풍습도 변해 갔습니다.
무로마치 시대를 더 즐기기 위해 당시의 흥미로운 일화와 서민 풍습을 3가지로 추려 소개합니다.
재미있었다면 무로마치 시대를 더 깊게 파고들어 보세요.

가신도 깜짝! 풍경을 가져가고 싶어 한 아시카가 요시미쓰

남조와 북조로 갈라져 있던 조정을 하나로 통합하는 위업을 이룬 무로마치 막부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
어린 시절 요시미쓰는 교토로 돌아가는 길에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가신들에게 “여기 풍경이 아름다우니 가져가자!” “너희가 메고 가거라!”라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상당한 ‘큰손’ 발언에 가신들이 놀랐다는 이야기죠. 큰일을 이룬 인물다운 에피소드입니다.

금각사 1층에 숨겨진 비밀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별장이었던, 금박으로 장식된 금각사.
화려한 금각사지만 사실 1층에는 금박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금각사 1층은 귀족 주거와 같은 신덴즈쿠리 양식.
2층은 무가 양식, 3층은 선종 양식인 불전즈쿠리로 되어 있습니다.
즉 1층에 금박이 없는 건, 귀족과 헤이안 귀족을 아래로 본 요시미쓰의 숨은 메시지였다는 해석입니다.

‘목욕 대접’으로 행복을 느낀 무로마치 시대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에게 절의 욕실을 개방해 목욕을 베푸는 ‘시요쿠(施浴)’는 무로마치 시대에 서민에게도 시행되기 시작했습니다.
점차 이 습관이 퍼져 갔지만, 목욕탕이 있는 집은 부유층에 한정됐습니다.

목욕이 있는 집은 손님을 초대해 집에서 목욕하게 하고, 목욕 후 차·술이나 식사 등을 내는 ‘후로 후루마이(風呂ふるまい)’가 풍습으로 자리 잡습니다.
목욕 후 먹고 마시며 행복을 느끼는 건, 무로마치 시대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무로마치 시대를 느낄 수 있는 스폿

무로마치 시대의 기타야마 문화·히가시야마 문화에서 세워진 건축물과 수묵화는 오늘날 일본에도 많이 남아 있으며 중요문화재·국보로 지정돼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무로마치 시대가 궁금해졌다면, 소개하는 역사 산책 스폿에 꼭 들러 보세요.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호화로운 별장 ‘금각사’

무로마치 막부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거처로 삼았던 ‘기타야마도노’를 기원으로 하는 사찰입니다.
요시미쓰의 법명을 따 ‘로쿠온지’로 이름 붙였으며, 그가 창건한 쇼코쿠지의 산가이 탓추 사원(=본원과 떨어진 곳에 은거 후의 암자를 지어 사찰로 만든 것)입니다.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은거처 ‘은각사’

무로마치 막부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지은 산장 ‘히가시야마도노’를 바탕으로 한 사찰입니다.
금각사와 함께 쇼코쿠지의 산가이 탓추 사원(=본원과 떨어진 곳에 은거 후의 암자를 지어 사찰로 만든 것)입니다.
요시마사 사후 법명에서 따 ‘지쇼지’로 이름 붙여졌습니다.

수묵화의 천재 셋슈가 조성한 ‘조에이지 셋슈 정원’

조에이지 셋슈 정원은 무로마치 시대 중기 오우치 마사히로가 별장으로 쓰기 위해 셋슈에게 명해 조성했다고 전해지는 정원입니다. 조에이지 본당 북쪽에 있으며,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깊이 있는 지형을 살린 지천회유식(池泉回遊式)입니다. 후가쿠(후지산)와 중국의 삼산오악에 빗대 넓게 펼쳐진 가레산스이 너머로 신지이케, 마른 폭포, 입석을 배치한 정원석 구성이 뛰어납니다. 선종 세계관이 살아 있는 일본 정원의 대표로서 국가 사적 및 명승으로 지정돼 있습니다.

사진

  • 무로마치 시대에 싸우던 무사의 이미지

    무로마치 시대에 싸우던 무사의 이미지

  •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상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상

  • 무사의 이미지

    무사의 이미지

  •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세운 금각사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세운 금각사

  • 오닌의 난 발발지 ‘가미고료 신사’

    오닌의 난 발발지 ‘가미고료 신사’

  • 야마시로국 잇키 종언의 땅

    야마시로국 잇키 종언의 땅

  • 현재는 공원이 된 오케하자마 전장

    현재는 공원이 된 오케하자마 전장

  •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추방된 도모노우라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추방된 도모노우라

  • 기타야마 문화를 대표하는 건축물 ‘금각사’

    기타야마 문화를 대표하는 건축물 ‘금각사’

  • 히가시야마 문화를 대표하는 건축물 ‘은각사’

    히가시야마 문화를 대표하는 건축물 ‘은각사’

연혁

1392년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남북조를 통일
1467년
오닌의 난
1485년
야마시로국 잇키 발생
1488년
가가의 잇코 잇키 발생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 발발
1568년
오다 노부나가가 교토에 입성
1573년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가와치로 추방하고 무로마치 막부가 멸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