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조 시대

남북조 시대

두 명의 천황·두 개의 조정·막부 내 두 파벌로 혼란이 극심했던 시대

갱신일 :

1336년부터 1392년까지 약 60년간 이어진 남북조 시대.
조정은 남조와 북조로 갈라지고, 막부도 내부에서 대립하며 혼란이 극심했던 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남북조 시대의 흐름과 문화를 되짚어봅시다.

포인트

  • 조정이 남조와 북조로 갈라지며, 같은 시기에 천황도 두 명이 존재했다
  • 무로마치 막부도 아시카가 다카우지파와 아시카가 다다요시파로 내부분열
  • 조정과 막부의 분열로 무사들 사이에서도 혼란이 확산
  • 지역 지배자로서 ‘슈고 다이묘’가 각지에 파견된다
  • 아시카가 요시미쓰에 의해 남북조가 통일된다

남북조 시대의 흐름

같은 시기에 천황이 두 명 존재하고, 조정도 둘로 나뉘며, 막부마저 내부분열을 겪은 남북조 시대.
무사들 사이에서도 혼란이 퍼지고 혼미가 깊어지는 가운데, 조정과 막부가 어떻게 정리되어 갔는지 살펴봅시다.

두 명의 천황이 같은 시기에 존재한 드문 시대의 시작

고다이고 천황을 모신 요시노 신궁
고다이고 천황을 모신 요시노 신궁

가마쿠라 시대 중기, 황실에는 다이카쿠지토(大覚寺統)와 지묘인토(持明院統)라는 두 계통(천황의 혈통)이 있었습니다.
가마쿠라 막부가 정한 교대제에 따라 두 계통이 번갈아 천황을 맡는 체제가 이어집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자신들의 계통이 정통이라고 생각했고, 교대제에 대한 불만이 커져 갔습니다.

다이카쿠지토의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은 자신의 자손에게 황위를 잇게 하기 위해 가마쿠라 막부 타도를 시도합니다.
고다이고 천황은 천황을 중심으로 귀족과 무사가 구분 없는 정치를 이상으로 한 ‘겐무 신정(建武の新政)’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귀족에 비해 무사가 홀대받는 경향이 있었고, 타도의 실동 부대였던 무사들 사이에서 고다이고 천황에 대한 불만이 커져 갔습니다.

무장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와 그의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足利直義)가 거병해,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고다이고 천황은 패합니다.
겐무 신정은 불과 2년 만에 막을 내리고,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지묘인토의 고묘 천황(光明天皇)을 옹립해 무로마치 막부를 열었습니다.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패한 뒤 고다이고 천황은 교토에서 나라현 요시노로 달아납니다.
패배 후에도 물러서지 않은 고다이고 천황이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 다이카쿠지토의 고다이고 천황이 다스리는 ‘남조’
·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옹립한 지묘인토의 고묘 천황이 다스리는 ‘북조’
라는, 두 명의 천황과 두 개의 조정이 존재하는 드문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무로마치 막부의 분열로 대규모 동란이 일어난다

아시카가 다카우지 동상
아시카가 다카우지 동상

북조의 천황을 옹립하고 막부를 연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足利直義)와 대립하게 됩니다.
막부 내에서 불리해진 아시카가 다다요시는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반대 세력인 남조 편에 섭니다.

이 대립을 계기로 막부와 무사단의 주종 관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되었고, 무사단은 자신들의 영지를 확보하는 데 목적을 두고 움직이게 됩니다.
그 결과 무사단끼리도 누가 아군이고 적인지 모를 정도로 대립이 격화되어, ‘남북조의 동란’이라 불릴 만큼 큰 전쟁으로 번져 갔습니다.

흩어진 무사들을 묶기 위해 무로마치 막부는 유력 무사를 슈고(군사 지휘관·행정관)로 임명해 지방에 파견합니다.
무사들을 통제하기 위해 슈고의 권한을 강화해 나갔고, 결국 지역 지배자에 가까운 권한과 권력을 갖게 되며 ‘슈고 다이묘’로 불리게 됩니다.

남북조의 통일

남북조를 통일한 아시카가 요시미쓰 동상
남북조를 통일한 아시카가 요시미쓰 동상

무로마치 막부의 정책이 효과를 보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가 3대 쇼군이 될 무렵에는 막부의 힘이 강해지고 남조와 북조는 약해져 갔습니다.
북조에서 좌대신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남북조를 통일한 뒤 자신이 정점에 서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각지에서 쇼군으로서의 힘을 과시한 무로마치 막부는 마침내 남조와 ‘메이토쿠 화약(明徳の和約)’을 맺습니다.
메이토쿠 화약은
· 다이카쿠지토(남조)와 지묘인토(북조)가 교대로 천황에 즉위할 것
· 황실의 영지는 일정한 규칙에 따라 나눌 것
· 남조는 정식 의식을 거쳐 삼종신기(황위의 상징으로 대대로 전해 내려온 세 가지 보물)를 북조에 넘길 것
등을 정한 것으로, 북조가 과거 남조의 정통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남조에 유리한 조약이었습니다.

하지만 약해진 북조에는 무로마치 막부에 반발할 힘이 없었고, 북조도 이 조건을 받아들이며 남북조는 통일에 이릅니다.
통일 후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남조 측을 설득해 천황은 북조의 천황 1명으로 정리됩니다.
이렇게 약 60년에 걸친 남북조의 동란은 막을 내렸습니다.

남북조 시대의 문화

혼란이 극심했던 남북조 시대에는 어떤 작품들이 탄생했을까요?
남북조 시대 작품 중에서도 특히 유명하고 시대를 상징하는 작품들을 간단히 소개합니다.

‘정답’을 찾기 위해 많은 역사서가 만들어지다

역사서 이미지
역사서 이미지

그 어느 때보다 불안정한 정세가 이어진 남북조 시대.
기존의 사회 구조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조정과 막부뿐 아니라 서민들도 혼란에 빠져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일수록 역사에서 ‘올바른 답’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커졌고, 겐페이의 소란부터 약 150년의 역사를 귀족의 시점에서 기록한 ‘마스카가미(増鏡)’나, 신토 이론을 바탕으로 남조 시점에서 황위 계승의 정당성을 적은 ‘진노 쇼토키(神皇正統記)’ 등 다양한 역사서가 탄생했습니다.

후대에 큰 영향을 준 ‘태평기’

태평기에 그려진 그림 이미지
태평기에 그려진 그림 이미지

일본인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태평기(太平記)’가 탄생한 남북조 시대.
남북조 동란의 전체상을 그린 군기물로, 강담(講釈) 형태로 퍼지며 후대까지 큰 영향을 남겼습니다.
기존의 군기물은 비와호시가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강담’ 형태로 확산된 점도 태평기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남북조 시대를 느낄 수 있는 스폿

남북조 시대와 인연이 있는 스폿을 소개합니다.
혼란의 시대에 마음을 두고, 당시 문화도 직접 느껴보는 건 어떨까요?

전국 굴지의 명성 ‘다카토리성터’

나라현 중부 다카토리정에 있는 산성 유적.
남북조 시대에 지역 호족 오치 씨가 쌓은 것이 성의 시작으로 여겨집니다.
산기슭의 성하마을과 혼마루의 고도 차는 446m로, 근세 성곽으로는 일본 최고 수준의 높이 차를 자랑합니다.
전국적으로도 손꼽히는 명성으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일본성곽협회의 ‘일본 100명성’에도 선정되었습니다.

남북조 시대 악기가 보존된 ‘묘코인’

859년, 신뇨호신노(眞如法親王)가 개산했다는 전승이 있는 진언종 사찰.
절 북쪽에는 경외 불당으로 곤피라도가 모셔져 있습니다.
사찰에서 독경 중에 치는 악기 ‘케이(磬)’가 보존되어 있는데, 이는 남북조 시대(14세기)의 것입니다.

사진

  •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킨 고다이고 천황의 옥좌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킨 고다이고 천황의 옥좌

  • 고다이고 천황을 모신 요시노 신궁

    고다이고 천황을 모신 요시노 신궁

  • 아시카가 다카우지 동상

    아시카가 다카우지 동상

  • 남북조를 통일한 아시카가 요시미쓰 동상

    남북조를 통일한 아시카가 요시미쓰 동상

  • 역사서 이미지

    역사서 이미지

  • 태평기에 그려진 그림 이미지

    태평기에 그려진 그림 이미지

연혁

1333년
가마쿠라 막부 멸망
1334년
겐무 신정 시작
1336년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패한 고다이고 천황이 요시노로 옮기며 남북조가 성립
1338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세이이타이쇼군이 되다
13378년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막부를 무로마치로 옮기다
1392년
남북조 통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