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부사와 에이이치
도덕과 경제를 함께 이룬 자본주의의 아버지
실업계의 아버지, 은행의 아버지,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 등 다양한 별칭으로 불리는 위인 ‘시부사와 에이이치’.
생애 동안 설립에 관여한 기업이 500개를 넘는다고 전해진다.
자신의 이익에 집착하지 않고 일본 사회 전체에 기여하며 도덕과 경제의 양립을 실천한 인물이다.
그 공로로 2024년 발행 1만 엔 지폐의 초상으로도 선정됐다.
2021년에는 대하드라마 ‘세이텐을 쳐라(青天を衝け)’에서 그의 생애가 그려졌다.
이 글에서는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구체적인 업적과 생애는 물론, 명언과 일화로 드러나는 또 다른 면모까지 소개한다.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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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동안 설립에 관여한 회사 수는 500개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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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초의 은행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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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회사 제도를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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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공헌 활동도 적극적으로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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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부터 발행되는 1만 엔 지폐의 초상으로 선정
시부사와 에이이치 인물 연표
- 1840년
- 사이타마현 후카야시에서 부유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남
- 1863년
- 에도에서 유학하던 중 존왕양이 사상에 눈뜨고 막부 타도를 꾀했으나 단념. 교토로 도피.
- 1864년
- 훗날 쇼군이 되는 히토쓰바시 요시노부의 가신이 됨
- 1866년
- 히토쓰바시 요시노부가 에도 막부의 쇼군이 되고, 시부사와 에이이치도 막신이 됨
- 1867년
- 막신으로 프랑스에 파견
- 1868년
- 에도 막부에서 신정부로 정치 체제가 바뀌며,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귀국
- 1869년
- 시즈오카번에서 첫 사업 ‘쇼호카이쇼(商法会所)’를 세운 뒤, 정부에 출사
- 1872년
- 오쿠라쇼(대장성)의 요직에 취임. 일본 최초의 은행을 설립
- 1873년
- 오쿠라쇼(대장성) 퇴직
- 1878년
- 시부사와 에이이치와 유력 재계 인사들이 ‘도쿄 주식거래소’를 설립
- 1888년
- 이토 히로부미·가쓰 가이슈와 함께 ‘도쿄 여자학관’을 개교
- 1901년
- 일본 여자대학을 개교
- 1909년
- 실업계 은퇴를 표명
- 1916년
- 실업계에서 공식 은퇴
- 1931년
- 대장 협착증으로 사망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업적
‘은행의 아버지’, ‘실업계의 아버지’로도 불리며 일본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한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업적은 셀 수 없을 정도다.
그중에서도 꼭 알아두면 좋은 대표 업적을 소개한다.

일본 최초의 국립은행과 각지 은행 설립 지원
1873년에 설립된 ‘제일국립은행’은 일본 최초의 국립은행이다.
이 ‘제일국립은행’에도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깊게 관여했다.
메이지 시대(1868년~1912년)의 유력 자본가였던 ‘미쓰이구미’와 ‘오노구미’를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설득해 ‘미쓰이 오노 조합은행’을 출범시켰다.
동시에 ‘국립은행 조례’도 입안했다.
국립은행 조례는 ‘과거에 발행한 화폐를 정리해 새로운 지폐를 발행하고, 돈을 빌릴 수 있는 기관을 만든다’는 내용이었다.
1872년 정부는 ‘국립은행 조례’를 공포.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정부의 허가를 받아 ‘미쓰이 오노 조합은행’을 ‘제일국립은행’으로 개편해 일본 최초의 국립은행을 설립했다.
이후 각지에서 국립은행 설립을 원하는 이들이 늘자,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적극적으로 개업을 지원했다.
그의 지원을 받은 은행들은 지금도 여러 지역에 남아 있다.
일본 각지에 은행이 생기면서 산업 발전에 기여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이유로 ‘은행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일본 최초의 주식회사 설립과 주식회사 확산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유럽을 여행하며 주식회사 구조를 접하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귀국 후 처음 시작한 사업도 시즈오카번(현재의 시즈오카현) 자금과 지역의 부유한 농가로부터 출자를 모아, 주식회사와 비슷한 방식으로 설립했다.
1871년에는 정부 요직에 있으면서도 주식회사 제도를 알리는 ‘릿카이랴쿠소쿠(立会略則)’를 간행했다.
이를 계기로 일본 전역에 회사 설립 분위기가 조성됐다.
계몽에 그치지 않고, 시부사와 에이이치 자신도 일본 최초의 주식회사로 알려진 ‘제일국립은행’을 설립했다.
은행을 경영하며 일본의 창업가·경영자들에게 주식회사 제도를 확산시키고, 다양한 사업을 지원해 나갔다.

500개가 넘는 회사 설립에 관여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생애 동안 설립에 관여한 회사는 500개가 넘는다고 전해진다.
그중에는 지금도 존속하는 유명 기업도 많다.
예를 들어 일본 최초의 은행인 ‘제일국립은행’은 ‘미즈호은행’으로 이어지고, 그 밖에도 ‘삿포로맥주’, ‘도호가스’, ‘도쿄전력 홀딩스’, ‘아사히맥주’, ‘일본우선’ 등 끝이 없을 정도다.
기업뿐 아니라 도쿄증권거래소, 중소기업 경영 지원을 하는 ‘도쿄상공회의소’ 설립에도 관여했다.
이것이 그가 ‘실업계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다.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생애
수많은 업적을 남긴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소년기부터 다양한 성과를 이루기까지, 그의 생애를 간단히 소개한다.
14세에 이미 장사 수완을 보인 소년기
현재의 사이타마현 후카야시에서 부유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난 ‘시부사와 에이이치’.
어릴 때부터 논어와 ‘일본외사’를 배우는 등 학문에 힘썼다.
한편으로는 할아버지와 장을 보러 다니며 협상으로 좋은 재료를 싸게 들여오는 등 장사 수완도 발휘했다.
20세가 넘어서도 에도(현재의 도쿄)에 자주 드나들며 학문과 검술을 익혔다.

존왕양이 사상에 눈뜨지만 교토로 도피
에도에서 학문을 익히던 중 존왕양이 사상에 눈뜬 ‘시부사와 에이이치’.
에도 시대 말기의 일본은 쇄국 체제가 무너지고 무역이 시작되면서 사회가 혼란하던 시기였다.
정권을 잡은 에도 막부에 대한 불신이 커지며, 쇼군이 아니라 본래 일본의 최고 권력자인 천황이 정권을 잡아야 한다는 ‘존왕론’이 확산됐다.
무역을 시작한 외국을 배척하는 사상과 존왕론이 결합해 ‘존왕양이’ 사상이 퍼지고, 점차 격화됐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도 이에 경도돼 무역 거점인 요코하마항을 습격하는 계획까지 세운다.
하지만 ‘양이파’의 열세를 이유로 동료들의 설득을 받아 계획을 중단했다.
가족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막부 내에서도 격이 높은 ‘히토쓰바시가’의 가신 ‘히라오카 엔시로’를 의지해 교토로 도피했다.

훗날 쇼군이 되는 인물과의 만남
교토에서 몸을 숨기며 존왕양이 계획을 구상하던 ‘시부사와 에이이치’였지만, 히라오카 엔시로가 모시던 ‘히토쓰바시 요시노부’의 부하로 추천하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히토쓰바시 요시노부는 훗날 쇼군이 되는 인물이었기에 자신이 믿던 사상과 반대되는 제안에 망설였지만, 이를 받아들여 다시 에도로 돌아가게 된다.
막부 아래에서 일하기 시작하자 성실함과 재능을 인정받아, 히토쓰바시가의 재정을 맡는 ‘칸조구미가시라(勘定組頭)’로 임명된다.

인생의 전환점이 된 유럽 출항
그가 모시던 히토쓰바시 요시노부가 쇼군의 자리를 이어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된다.
하지만 에도 막부를 공격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막부 타도를 목표로 한 조슈번(현재의 야마구치현)과 사쓰마번(현재의 가고시마현)과의 전투에 종군한 것을 계기로,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막신(쇼군 직속 가신)이 된다.
이후 파리 만국박람회의 막부 사절로 선발돼 프랑스로 건너간다.
프랑스뿐 아니라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등도 방문하며 언어와 최첨단 과학·인프라·사회 시스템을 직접 보고, 일본이 세계에 비해 뒤처졌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특히 은행과 주식회사 구조에 큰 감명을 받아 유럽 경제도 깊이 배웠다.
유럽에서의 경험은 가치관을 바꾸고 새로운 지식을 얻게 한, 그의 인생을 바꾼 큰 전환점이 됐다.

신정부에서 활약하지만 민간 사업으로 길을 틀다
일본으로 돌아오자 정권은 에도 막부에서 새 정부로 넘어가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모시던 도쿠가와 요시노부 곁으로 돌아가 일하기로 결심한다.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근신하던 시즈오카에서 지역 상인들의 출자를 모아 ‘쇼호카이쇼(商法会所)’를 설립했다.
쇼호카이쇼는 금융업과 상사를 겸하는, 은행에 가까운 기능과 주식회사와 비슷한 구조를 가진 조직이었다.
하지만 정부의 요청과 설득을 받아, 오쿠라쇼(국가 재정을 담당하는 부처)와 사실상 통합돼 있던 민부쇼의 직책을 맡게 된다.
그는 조직 개혁과 세제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다양한 혁신 제도를 만들고 우편 제도의 기반이 되는 사업도 입안했다.
오쿠라쇼의 요직으로 승진했지만 내부 갈등으로 사직. 민간 사업을 통해 상업 발전에 기여하는 길을 선택했다.

일본 최초의 국립은행 설립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당시 유력 자본가인 ‘미쓰이구미’와 ‘오노구미’를 설득해 ‘미쓰이 오노 조합은행’을 출범시킨다.
이후 정부 허가를 받아 ‘제일국립은행’(현재의 미즈호은행)으로 개편해 일본 최초의 국립은행을 설립했다.
사직 후에는 ‘미쓰이구미’와 ‘오노구미’의 임원들을 감독하는 총감역에 취임한다.
‘제일국립은행’을 안정시키기 위해 뛰어다니는 한편, 양잠업·토목 사업·무역 등 다양한 사업에도 관여했다.
‘오노구미’의 도산을 계기로 ‘제일국립은행’의 두목(頭取, 은행장)에 취임.
경영 개혁을 추진하며 다른 국립은행의 개업 지원도 진행해, 각지 국립은행 설립에 기여했다.

500개가 넘는 사업 출범에 관여
이후 프랑스에서 배운 경영 방식도 살려 다양한 사업에 참여했다.
제지업, 방적업, 벽돌 공장, 양조장을 갖춘 맥주회사 등 일본 최초의 사업을 잇달아 성공으로 이끈다.
전기·가스 같은 인프라, 해운·육운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사업 성공으로 얻은 재산은 자신을 위해 쓰기보다 복지·교육·국제교류 등 공공 사회사업에 사용했다.
1909년 실업계 은퇴를 표명했고, 1916년 공식 은퇴. 1931년 병으로 사망했다.
세상을 떠나기까지 관여한 사업은 500개 이상.
일본 최초의 은행을 세우고 주식회사 구조를 확산시키며 공공 사회사업에도 기여했다.
도덕과 경제의 양립을 실천하며 일본 경제 발전을 이끈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실업계의 아버지’로 불린다.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명언
다른 위인들과 마찬가지로 ‘시부사와 에이이치’도 많은 명언을 남겼다.
그중에서도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일본 전체·사회 전체의 이익을 추구한 그의 생각이 드러나는 말을 소개한다.
- 무욕은 태만의 근원이다
- 세상의 모든 일은 이제 만족이라고 느끼는 순간, 곧 쇠퇴가 시작된다
- 한 사람만 부유해져서는 나라가 부유해지지 않는다
- 경제에는 국경이 없다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일화
자신의 이익만을 좇지 않고 일본 전체의 이익을 위해 기여하며 여러 사회 활동에도 힘썼던 ‘시부사와 에이이치’.
도덕과 경제를 함께 이룬 위인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만 ‘영웅은 여색을 좋아한다’는 말처럼, 그에게도 여성과 관련된 일화가 많다.
실제로 “여자 문제만 빼면 꺼릴 게 없다”고 그 자신이 말했을 정도다.
유곽에서 부모에게 받은 돈을 탕진
요코하마항 습격 계획이 미수로 끝난 뒤, 가족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도피하게 된 ‘시부사와 에이이치’.
아버지에게 도피 자금으로 약 200만 엔을 빌려 에도로 향했지만, 유곽에서 50만 엔가량을 써버린다.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변명이 있었다 해도, 부모에게 받은 도피 자금을 유곽에 쓰는 건 너무하지 않나 싶다.
아내 외에 낳은 아이가 최소 20명?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평생 두 명의 아내를 두었고, 7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것만으로도 현대 감각으로는 많게 느껴지지만, 사실 아내 외의 여성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최소 20명이라고 한다.
인지하지 않은 아이까지 합치면 100명 정도였다는 말도 있다.
하녀(가사 일을 하던 여성)에게 손을 댄 이야기, 첩을 아내와 함께 살게 했다는 이야기 등 현대의 가치관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화가 여럿 전해진다.
시부사와 에이이치와 인연이 있는 스폿
‘시부사와 에이이치’와 인연이 있는 스폿을 소개한다. 관심이 있다면 직접 방문해 보자.
그의 업적과 위대함을 체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 데이코쿠 호텔 도쿄
메이지 23(1890)년, 서구화를 추진하던 메이지 정부의 요청으로 해외 귀빈을 맞이하는 호텔로 개업했다.
설립 발기인은 당시를 대표하던 경제인들이었다. 개업 이후 19년 동안은 설립 발기인 총대 중 한 명이었던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경영을 지휘하며 초대 회장을 맡았다.
현재는 벨 스태프, 컨시어지, 세탁 등 각 분야의 숙련 스태프를 포함해 총 2000명이 국내외 게스트를 맞이한다. 고급스러운 서비스와 호스피탈리티로 세계의 게스트에게 사랑받고 있다.

2. 도키노카네(時の鐘)
도심에서 약 1시간 거리임에도 정취 있는 거리 풍경을 즐길 수 있는 가와고에.
이 도시를 대표하는 관광 명소 중 하나가 도키노카네(時の鐘)다. 옛 정취의 창고 건물(구라즈쿠리)이 늘어선 거리에서 특히 존재감이 큰 랜드마크로 꼽힌다.
목조 3층 망루로 높이는 약 16m. 오전 6시, 정오, 15시, 18시 하루 4번 종이 울려 시간을 알린다.
1893년 대화재를 겪은 ‘도키노카네(時の鐘)’.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재건을 위해 의연금을 모으고, 자신도 100만 엔 이상을 기부했다고 전해진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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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사와 에이이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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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발행 1만 엔 지폐의 초상으로도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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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사와 에이이치가 관여한 은행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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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상업의 기반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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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간판이나 광고에서 보던 기업에도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관여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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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에도 힘썼던 소년 시절의 시부사와 에이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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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가 탄 흑선 내항으로 개국한 에도 말기는 사회 전체가 혼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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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토쓰바시 요시노부는 훗날 에도 막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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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얻은 경험과 지식은 시부사와 에이이치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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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조직 개혁과 혁신 제도를 추진하며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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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일본의 중앙은행 ‘일본은행’에도 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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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뿐 아니라 인프라 정비에도 크게 기여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 프로필
- 이름
- 시부사와 에이이치
- 출생
- 1840년
- 사망
- 1931년
- 향년
- 91세
- 출생지
- 무사시국 하네자와군 지아라이지마촌(현재의 사이타마현 후카야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