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토쿠 태자

일본 역사에서 압도적인 인지도를 자랑하는 쇼토쿠 태자(聖徳太子).
아스카 시대(592년~710년)의 황족·정치가로 이름을 떨치며, 불교를 받아들인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 국가 체제 확립에 힘썼다.
정치·외교·불교 진흥(사찰 건립) 등 다방면에서 활약한 쇼토쿠 태자는 수많은 업적과 함께, 많은 일화와 미스터리를 남긴 인물로도 유명하다.
이 글에서는 쇼토쿠 태자가 생애를 통해 이룬 위업과, 출자에서 전해지는 인물상을 중심으로 알기 쉽게 소개한다.

포인트

  • 아스카 시대에 큰 업적을 남긴, 미스터리와 일화가 많은 황족·정치가
  • 관위12계 제정, 17조 헌법 제정 등 다양한 정책으로 천황 중심의 나라를 만들었다
  • 견수사 파견으로 수나라 문화를 일본에 들여왔다

쇼토쿠 태자 인물 연표

서기 사건
574년 다치바나노 도요히노 미코의 아들로 태어남
585년 아버지 다치바나노 도요히노 미코가 요메이 천황으로 즉위
587년 요메이 천황이 천연두로 붕어. 정미의 난 발발
593년 일본 최초의 여성 천황 스이코 천황 즉위, 쇼토쿠 태자는 섭정이 됨
603년 관위12계 제정
604년 17조 헌법 제정
607년 오노노 이모코를 견수사로 수나라에 파견
622년 천연두로 사망

쇼토쿠 태자의 위업

쇼토쿠 태자의 위업은 지금까지도 많이 전해지지만, 그중에는 현실감이 떨어지는 내용도 섞여 있다.
이 글에서는 문헌·사실 기록 등 근거가 남아 있는, 쇼토쿠 태자가 실제로 했다고 전해지는 업적을 소개한다.
참고로 쇼토쿠 태자는 ‘천황 중심의 나라 만들기 추진’과 ‘불교 진흥’을 실천한 인물이라고 알아두면, 이후 내용이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관위12계 제정

‘관위12계’는 603년 쇼토쿠 태자가 제정한 일본 최초의 관위·위계 제도다.
관위12계의 계급을 높은 순서대로 적으면 다음과 같다.

위명 대덕 소덕 대인 소인 대례 소례 대신 소신 대의 소의 대지 소지
관색 진자 연자 진청 연청 진적 연적 진황 연황 진백 연백 진흑 연흑

이처럼 조정 내에 ‘덕’ ‘인’ ‘례’ ‘신’ ‘의’ ‘지’ 6개 등급을 두고, 각각 대·소로 나눠 12종의 지위를 정했다.
또한 한눈에 지위를 구분할 수 있도록 12색 관을 각 관료에게 수여했다.
‘관’의 색으로 ‘위’를 ‘12’ ‘계’급으로 나눈 제도가 ‘관위12계’라고 이해하면 쉽다.
관위12계가 제정된 이유는 크게 ‘유능한 인재 등용’과 ‘외교 목적’ 두 가지로 알려져 있다.
당시 조정은 씨성 제도(혈연을 바탕으로 한 조직 제도)를 채택해 조정과 관료의 관계를 만들기 어려웠기 때문에, 관위를 통해 상하 관계를 명확히 했다.
가문이 아니라 개인에게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가문·신분과 관계없이 인재를 등용할 수 있게 한 획기적인 제도였다.
또한 외국에서 온 사신에게 일본에도 제대로 된 관위 제도가 갖춰져 있음을 보여주는 대외적 체면으로도 기능했다.

일본 최초의 관위·위계 제도인 관위12계 이미지
일본 최초의 관위·위계 제도인 관위12계 이미지

17조 헌법 제정

‘관위12계’ 제정으로 조정에 다양한 인재가 모이면서, 조직 전체를 정비할 규칙이 필요해졌다.
그래서 쇼토쿠 태자는 관료·귀족을 대상으로 도덕적 규범을 제시한 ‘17조 헌법’을 604년에 제정했다.※ ‘관위12계’와 마찬가지로 외국에 체면을 보이려는 목적도 포함
‘17조 헌법’은 일본 최고(最古)의 성문법(문서로 정리된 법)으로, 근대 일본에도 영향을 줬다고 한다.
헌법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실제 내용은 법·규율이라기보다 유교·불교 사상이 강하게 반영된 이념·마음가짐을 중심으로 정리된 것이 특징이다.
특히 1조부터 3조까지의 내용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간단히 말하면 다음 의미다.

  • 제1조: 화(和)를 귀하게 여겨라(조화와 대화를 중시하라)
  • 제2조: 삼보를 두텁게 공경하라(불교를 공경하라)
  • 제3조: 조(詔)를 받들면 반드시 삼가라(천황의 명령에 따르라)

이런 가르침이 17개 조항에 담겼으며, 독단 배제와 논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일본 최고 성문법인 17조 헌법 이미지
일본 최고 성문법인 17조 헌법 이미지

견수사 파견

쇼토쿠 태자는 외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인물이기도 하며, 견수사 파견은 큰 업적 중 하나다.
견수사란 일본이 수(현재의 중국)와 관계를 맺기 위해 보낸 사절단을 말하며, 목적은 주로 다음 2가지였다.
1.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발달한 수의 문화·제도를 받아들인다
2. 수와 대등한 관계를 맺고, 한반도의 나라들(신라·백제·고구려)에 대응한다
약 100년 만의 외교 사절단이었던 1차 견수사(600년)는 처신 등에 문제가 있어 수나라에서 상대해 주지 않아 실패로 끝난다.
다만 1번 목적은 일정 성과를 가져왔고, 앞서 말한 ‘관위12계’와 ‘17조 헌법’ 제정에도 반영됐다.
대외적 체면도 갖춘 607년에 대표 오노노 이모코 등을 2차 견수사로 파견하며, 수의 황제 양제에게 다음과 같은 국서를 보냈다.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글을 올립니다.”
이 내용에 양제는 수와 동격인 ‘천자’로 일본이 표현한 점, ‘해 지는 곳=쇠퇴’로 해석할 수 있다는 점 등으로 격노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고구려와 교전 중이던 수는 더 이상 적을 늘리지 않기 위해, 사신 배세청을 동행시켜 귀로까지 정중히 대했다.
이렇게 일본은 수와의 국교 수립에 성공했고, 이것이 쇼토쿠 태자의 의도대로였다고도 한다.

견수사가 수나라로 향하는 이미지
견수사가 수나라로 향하는 이미지

불교 진흥

일본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6세기 중반으로 전해지며, 당시에는 신도가 더 뿌리내려 있었다.
587년에는 불교파 소가 씨와 신도파 모노노베 씨 사이에 갈등이 생기며, 뒤에서 설명할 정미의 난이 일어난다.
소가 씨와 혈연 관계였던 쇼토쿠 태자는 불교파로, 소가 씨와 함께 전투에 참여했다.
이 내란에서 소가 씨가 승리하면서 일본은 불교 국가로서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한다.
쇼토쿠 태자는 불교 진흥을 이끈 핵심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아버지 요메이 천황의 뜻을 이어 607년에 창건한 ‘호류지’는 세계 최고(最古)의 목조 건축물로, 지금도 역사를 전한다.
그 밖에도 ‘시텐노지’ ‘고류지’ 등 불교를 널리 알리기 위한 많은 사찰 건립에 관여했다.
앞서 설명했듯 ‘17조 헌법’에도 불교의 가르침과 사고가 짙게 반영돼 있으며, 쇼토쿠 태자 없이 오늘날의 일본 불교를 말하기는 어렵다.

쇼토쿠 태자가 건립에 관여한 시텐노지
쇼토쿠 태자가 건립에 관여한 시텐노지

쇼토쿠 태자의 일화

미스터리가 많은 쇼토쿠 태자는 다양한 일화가 전해지는 위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여기서는 특히 유명한 일화 3가지를 소개한다.

10명의 말을 듣고 모두 이해했다

쇼토쿠 태자의 재능을 전하는 일화 중 가장 유명한 것이 ‘10명의 말을 동시에 들었다’는 이야기다.
성인이 된 쇼토쿠 태자는 동시에 10명의 말을 듣고 모두 이해했다고 전해지지만, 8명·36명 등 여러 설이 있다.
다만 쇼토쿠 태자는 다양한 의견에 귀 기울이고 기억력도 뛰어난 총명한 인물로 전해지기 때문에, 과장된 이야기라는 시각도 적지 않다.
진상은 지금도 알 수 없지만, 쇼토쿠 태자의 인덕과 지성을 보여준다는 점은 분명하다.

보통 사람이라면 10명의 말을 구분해 듣는 것조차 어렵다
보통 사람이라면 10명의 말을 구분해 듣는 것조차 어렵다

쇼토쿠 태자는 실존 인물이 아니었다?

최근 연구에서는 쇼토쿠 태자가 실존하지 않았다는 설도 제기된다.
‘관위12계 제정’ ‘견수사 파견’ ‘불교 진흥’ 등 수많은 업적이 한 사람이 했다고 보기엔 너무 크다는 점이 이유로 꼽힌다.
또 ‘17조 헌법’에 당시에는 없던 표현이 쓰였다는 점에서, 쇼토쿠 태자가 관여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게다가 ‘쇼토쿠 태자’라는 이름은 시호(사후에 내려진 칭호)이며, 생전의 이름은 ‘우마야도노 오지(厩戸皇子)’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 연구로 밝혀졌다.
그래서 최근 교과서 등에서는 ‘우마야도노 오지(쇼토쿠 태자)’로 소개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쇼토쿠 태자와 관련된 확실한 사료가 없어 학계에서도 의견이 갈리며,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실존하지 않았다는 설이 나올 만큼 미스터리가 많은 쇼토쿠 태자
실존하지 않았다는 설이 나올 만큼 미스터리가 많은 쇼토쿠 태자

일본 지폐에 초상이 가장 많이 쓰인 인물

쇼토쿠 태자는 일본에서 가장 많이 지폐 초상으로 쓰인 인물이다.
1930년 100엔권에 등장한 이후 1,000엔권·5,000엔권·10,000엔권에도 사용됐고, 1984년까지 총 7번이나 지폐가 됐다.
1958년에 처음 발행된 10,000엔권 초상은 26년 동안 채택돼, 한때는 ‘쇼토쿠 태자=고액권의 얼굴’로도 친숙했다.
지금은 사용되지 않지만, 횟수·기간에 더해 3종의 지폐 초상으로 쓰인 사례가 쇼토쿠 태자 외에는 없다는 점이 그 위상을 말해준다.

쇼토쿠 태자가 초상으로 쓰인 지폐
쇼토쿠 태자가 초상으로 쓰인 지폐

쇼토쿠 태자의 생애

헤아릴 수 없는 업적을 남긴 한편, 실존하지 않았다는 말도 있는 쇼토쿠 태자.
여기서는 많은 미스터리에 싸인 쇼토쿠 태자의 출자를 통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소개한다.
시대적 배경까지 함께 알면 쇼토쿠 태자의 위대함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구간 앞에서 태어난 쇼토쿠 태자

쇼토쿠 태자는 574년 아버지 다치바나노 도요히노 미코(橘豊日皇子)와 어머니 아나호베노 하시히토노 히메미코(穴穂部間人皇女)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훗날 요메이 천황, 어머니는 긴메이 천황의 황녀로, 양가의 외가가 모두 소가노 이나메의 딸에 해당해 소가 씨와 강한 혈연 관계를 갖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쇼토쿠 태자가 ‘나무불, 나무불’이라고 외웠다는 전승도 있어 불교와의 인연도 깊다.
여러 이름으로 불렸지만, 어머니가 마구간(우마야) 앞에서 출산했다는 이야기에서 ‘우마야도노 오지’라 불렸다.
쇼토쿠 태자가 13세였을 때 아버지가 요메이 천황으로 즉위했고, 소가노 우마코의 요청도 있어 불교를 조정에서 공인하고 진흥하겠다고 표명한다.
이로 인해 폐불파의 중심 인물 모노노베노 모리야를 중심으로 한 모노노베 씨와 소가 씨의 대립이 뚜렷해졌다.
게다가 요메이 천황은 천연두로 재위 약 2년 만에 세상을 떠난다.
숭불 논쟁에 더해 황위 계승 문제까지 얽히며, 소가 씨와 모노노베 씨의 갈등은 격화된다.

쇼토쿠 태자가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마구간 이미지
쇼토쿠 태자가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마구간 이미지

정미의 난에서 모노노베노 모리야를 꺾다

소가 씨와 모노노베 씨의 대립은 내란으로 번지며, 마침내 정미의 난이 시작됐다.
공격하는 소가 씨와 방어하는 모노노베 씨의 구도로 전개된 전투는, 수비를 굳힌 모노노베 씨가 초반 우세를 점했다.
이를 본 당시 14세의 쇼토쿠 태자는 그 자리에서 사천왕 상을 만들고 승리를 기원해 전세를 수습한 뒤, 소가노 우마코 등과 함께 모노노베노 모리야의 저택으로 진군한다.
일진일퇴의 격렬한 공방 속에서 총대장 모노노베노 모리야의 전사로 전황이 바뀌며, 소가 씨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다만 정미의 난으로 쇼토쿠 태자는 외가 친족을 잃는 비통함도 겪었다.
이 결과 모노노베 씨는 몰락해 중앙에서 배제됐고, 소가 씨가 조정 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소가노 우마코·쇼토쿠 태자를 중심으로 위세가 강화됐다.
또 폐불파 세력도 약화되며 불교의 확산이 본격화된다.
천황과 소가 씨의 지배는 645년 을사의 변까지 약 60년 이어졌으며, 정미의 난은 일본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소가 씨의 승리로 불교 확산이 본격화됐다
소가 씨의 승리로 불교 확산이 본격화됐다

섭정으로서 수많은 위업을 이루다

592년에는 스슌 천황이 암살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벌어진다.
갑작스레 후계자 문제에 직면한 소가노 우마코는 고심 끝에 여성을 차기 천황으로 세우기로 한다.
이렇게 일본 최초의 여제 스이코 천황이 탄생했다.
당시 관례로 정치는 남성이 맡는 경우가 많아, 20세의 쇼토쿠 태자가 섭정(천황을 보좌하는 역할)으로 뽑혀 소가노 우마코·스이코 천황과 함께 권력의 핵심을 이뤘다.
고구려 승려 혜자를 스승으로 둔 쇼토쿠 태자는 섭정이 되자, 먼저 삼보(불·법·승)의 흥륭을 추진한다.
이는 앞서 말한 견수사 파견으로 이어졌고, 대륙 문화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며 불교 확산에도 연결됐다.
쇼토쿠 태자는 법화경·승만경·유마경 3개 경전의 주석서인 ‘삼경의소(三経義疏)’를 후세에 남겼다고 전해진다.
불교 진흥이 진전되자 불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애민 통치를 펼치며, ‘관위12계’ 등 다양한 제도 정비에도 힘썼다.
큰 업적을 남긴 쇼토쿠 태자는 공교롭게도 아버지와 같은 천연두로, 49세였던 622년에 생을 마감한다.
사후에는 비가 ‘천수국수장(天寿国繍帳)’을 만들었다.

지금도 쇼토쿠 태자 상과, 건립에 관여한 사찰이 곳곳에 남아 있다
지금도 쇼토쿠 태자 상과, 건립에 관여한 사찰이 곳곳에 남아 있다

쇼토쿠 태자의 명언

일본 역사에 이름을 남긴 쇼토쿠 태자는 아래를 비롯해 다양한 명언·격언을 전했다.

  • 세상은 헛되니 오직 부처만이 진실이다(돈·명예 등을 가치로 삼는 세상은 공허하고, 부처의 가르침만이 진실이다)
  • 공과를 분명히 살펴 상벌을 반드시 공정하게 하라(제대로 살핀 뒤 정당하게 상벌을 내리라)
  • 큰일은 혼자 결정하지 말고 반드시 여러 사람과 함께 논의하라(중요한 일은 관계자와 상의해 신중히 진행하라)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말은 ‘17조 헌법’의 첫머리에도 나온 ‘화(和)를 귀하게 여겨라’다.
원래 중국의 위인 공자의 언행을 모은 ‘논어’에서 유래한 이 말은, 조화와 대화를 소중히 하라는 뜻이다.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되, 다툼을 피하려고 감정이나 생각을 억누르지 말고 납득할 때까지 대화해야 한다는 중요성을 말한다.
즉, 단순한 동조가 아니라 이해·합의를 바탕으로 조화를 이루며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쇼토쿠 태자가 세운 사찰

쇼토쿠 태자가 창건한 사찰 중 특히 유명한 2곳을 소개한다.
두 곳 모두 긴 역사를 지닌 인기 관광지다.
국보·중요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이 많아, 현장을 찾으면 쇼토쿠 태자와 일본 전통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이 밖에도 나라현을 중심으로 쇼토쿠 태자와 관련된 스폿은 많으니, 궁금하다면 찾아보자.

1. 호류지

나라현 이코마군 이카루가초에 있는 ‘호류지’는 1,3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사찰이다.
쇼토쿠종(불교 종파 중 하나)의 총본산이며, 쇼토쿠 태자가 창건한 사찰로도 알려져 있다.
‘세계 최고(最古)의 목조 건축’으로 유명한 호류지에는 현존하는 건조물이 남아 있고, 그 대부분이 국보·중요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국보만 38건 150점, 중요문화재까지 포함하면 약 3,000점에 이르는 규모다.
세계적으로도 가치를 인정받아 1993년 ‘호류지 지역의 불교 건조물’ 명의로 ‘히메지성’과 함께 일본 최초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세계 최고(最古)의 목조 건축 호류지는 볼거리가 많다
세계 최고(最古)의 목조 건축 호류지는 볼거리가 많다

2. 와슈 종본산 시텐노지

‘일본 불교의 시조’로 불리는 쇼토쿠 태자가 593년에 창건했다.
헤이안 시대에 들어 사람들의 존경이 신앙으로 바뀌며, 태자 신앙의 성지로 지금도 많은 신앙을 모으고 있다.
쇼토쿠 태자 창건 사찰이라는 점에서 1949(쇼와 24)년에 ‘와슈’로 새롭게 입종했다.
경내의 가람 배치는 ‘시텐노지식 가람 배치’로 불리며, 일본 최고(最古)의 건축 양식 중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일직선으로 늘어선 중문·오층탑·금당·강당을 회랑이 둘러싸는 형식은 중국과 한반도에서도 보이며, 고대 일본의 대륙과의 연결을 엿볼 수 있다.

쇼토쿠 태자가 세운 일본 불법 최초의 관사
쇼토쿠 태자가 세운 일본 불법 최초의 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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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쇼토쿠 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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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최초의 관위·위계 제도인 관위12계 이미지

    일본 최초의 관위·위계 제도인 관위12계 이미지

  • 일본 최고 성문법인 17조 헌법 이미지

    일본 최고 성문법인 17조 헌법 이미지

  • 견수사가 수나라로 향하는 이미지

    견수사가 수나라로 향하는 이미지

  • 쇼토쿠 태자가 건립에 관여한 덴노지

    쇼토쿠 태자가 건립에 관여한 덴노지

  • 보통 사람이라면 10명의 말을 구분해 듣는 것조차 어렵다

    보통 사람이라면 10명의 말을 구분해 듣는 것조차 어렵다

  • 실존하지 않았다는 설이 나올 만큼 미스터리가 많은 쇼토쿠 태자

    실존하지 않았다는 설이 나올 만큼 미스터리가 많은 쇼토쿠 태자

  • 쇼토쿠 태자가 초상으로 쓰인 지폐

    쇼토쿠 태자가 초상으로 쓰인 지폐

  • 쇼토쿠 태자가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마구간 이미지

    쇼토쿠 태자가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마구간 이미지

  • 소가 씨의 승리로 불교 확산이 본격화됐다

    소가 씨의 승리로 불교 확산이 본격화됐다

  • 지금도 쇼토쿠 태자 상과, 건립에 관여한 사찰이 곳곳에 남아 있다

    지금도 쇼토쿠 태자 상과, 건립에 관여한 사찰이 곳곳에 남아 있다

쇼토쿠 태자 프로필

이름
쇼토쿠 태자
출생
574년
사망
622년
향년
49세
출생지
현재 나라현 다카이치군 아스카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