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음에도 일본 공가(귀족)의 최고위직인 간파쿠까지 올라 천하통일을 이룬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에서 가장 크게 출세한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함께 전국시대 3대 영웅으로 불립니다.
가난한 농민으로 태어난 인물이 어떻게 천하를 통일했는지, 어떤 인물이었는지 그의 생애와 일화, 명언을 통해 상상해 봅시다.

포인트

  • 오다 노부나가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처럼 무가 출신이 아니라 가난한 농민 출신입니다
  •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 되어 말 사육 담당과 짚신 시종으로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 노부나가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가신에서 무장까지 출세했습니다
  • 혼노지의 변을 알게 된 히데요시는 주고쿠 대회군이라는 놀라운 기동을 펼쳐 아케치 미쓰히데를 토벌했습니다
  • 귀족 가문의 양자가 되어 귀족 최고위직인 간파쿠에 올랐습니다
  • 한평생 만에 천하를 통일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인물 연표

연도 주요 사건
1537년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납니다
1551년 이마가와 가문의 배신을 섬깁니다
1554년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 됩니다
1566년 진격을 위한 전초기지로 스노마타성을 단 하룻밤 만에 축성합니다
1570년 가네가사키 전투에서 후위를 맡아 노부나가를 무사히 퇴각시킵니다
1572년 하시바 히데요시로 개명합니다
1574년 오미 나가하마성의 성주가 됩니다
1582년 빗추 다카마쓰성 전투에서 수공으로 성을 함락합니다
1582년 혼노지의 변이 일어납니다
1582년 주고쿠 대회군을 감행한 히데요시가 아케치 미쓰히데를 토벌합니다
1582년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정하는 기요스 회의에서 히데요시가 추천한 산보시가 후계자로 결정됩니다
1583년 시바타 가쓰이에와 벌인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승리해 노부나가의 후계자로서 입지를 굳힙니다
1583년 오사카성을 축성합니다
1584년 오다 노부카쓰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을 상대로 한 고마키·나가쿠테 전투가 일어납니다
1585년 간파쿠로 임명됩니다
1590년 호조 가문을 항복시켜 명실상부한 천하통일을 이룹니다
1592년 조선을 침략합니다
1593년 측실 요도도노가 후계자가 될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낳습니다
1598년 병으로 사망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생애

농민으로 시작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생애를 그가 남긴 업적과 함께 살펴봅시다.

가난한 농민에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섬긴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섬긴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37년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오와리국(현재의 아이치현)을 떠돌며 일자리를 찾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세 때 이마가와 가문의 배신인 마쓰시타 씨를 섬깁니다.
※배신=가신의 가신
하지만 특별 대우를 받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른 가신들의 질투를 받아 마쓰시타 씨의 곁을 떠나게 됩니다.
※떠나게 된 이유에는 여러 설이 있어 진위는 알 수 없습니다.

다시 일자리를 찾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8세 때 오다 노부나가를 만나 가신으로 섬깁니다.

오다 노부나가 밑에서 승승장구해 한 나라와 한 성의 주인이 되다

가신이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말 사육 담당, 짚신 시종, 주방 관리 등 여러 업무에서 성과를 냅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일화는 짚신 시종으로 일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눈 내리는 밤, 오다 노부나가는 짚신을 신다가 짚신이 따뜻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짚신이 따뜻한 이유를 묻자 “품속에 넣어 따뜻하게 해 두었습니다”라고 답했고, 오다 노부나가는 그의 세심한 배려에 감탄했다고 합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능력주의자였던 만큼 성과를 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인정을 받아 빠르게 출세합니다.
승승장구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평가를 확고히 한 사건이 바로 스노마타 일야성입니다.
적지를 공격할 전초기지에 성을 지으려던 오다군은 적의 방해로 축성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무사 신분으로 출세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계책을 올립니다.
축성 예정지의 강 상류에서 목재를 필요한 형태로 미리 다듬고, 밤에 목재를 강으로 흘려보내 단 하룻밤 만에 스노마타성을 완성한 것입니다.

이후에도
적의 허를 찌른 야습으로 성을 함락한 ‘간논지성 전투’
패전한 오다 노부나가를 탈출시키기 위해 가장 위험한 후위(패주하는 군대의 맨 뒤)를 맡아 적의 추격을 따돌린 ‘가네가사키 전투’
등에서 활약한 공로를 인정받아 오다 노부나가에게 오미 나가하마성을 하사받았고, 가난한 농민의 아들은 마침내 한 나라와 한 성의 주인으로 출세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은 자리를 목표로 오다 노부나가가 명한 주고쿠 지방 공략에 착수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 있는 수공과 군량 차단 같은 전술, 사람을 따르게 하는 재능을 활용해 주고쿠 지방 공략을 순조롭게 진행했습니다.

2만 대군이 경이적인 속도로 대이동! 주고쿠 대회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고쿠 지방 공략을 진행하던 중, 역시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던 아케치 미쓰히데가 반란을 일으켰고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는 자결합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죽음을 알게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공격 중이던 모리 씨와 즉시 강화를 맺고 아케치 미쓰히데가 있는 교토로 서둘러 향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만 대군을 이끌고 공략 중이던 현재의 오카야마현에서 약 230km 떨어진 교토까지 단 10일 만에 도착했습니다.
당시에는 당연히 신칸센도 비행기도 자동차도 없었으며, 이동 수단은 도보와 말뿐이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경이적이었던 속도 때문에 이 대이동을 주고쿠 대회군이라고 부릅니다.
주고쿠 대회군을 거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원수인 아케치 미쓰히데를 토벌합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 다툼에서 권력을 강화하다

기요스 회의가 열린 기요스성의 모습
기요스 회의가 열린 기요스성의 모습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뒤 그의 권력과 영지를 이을 후계자를 결정하는 기요스 회의가 열립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시바타 가쓰이에는 셋째 아들 오다 노부타카를 추천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손자인 산보시를 추천하면서 양측이 대립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전 교섭도 힘을 발휘해 산보시가 후계자가 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의 후견인이 되어 실질적인 지배권을 얻습니다.
기요스 회의에서 생긴 갈등은 큰 골로 이어져 결국 전쟁으로 발전합니다.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시바타 가쓰이에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격돌했고, 승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돌아갑니다.

후계자 후보였던 오다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 오다 노부카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어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대립했고, 이는 고마키·나가쿠테 전투로 발전합니다.
오다 노부카쓰·도쿠가와 이에야스군이 약 1만 6천 명이었던 데 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군은 10만 명으로 압도적인 병력 차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도요토미 히데요시군은 불리해졌습니다.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카쓰에게 단독 강화를 제안합니다.
오다 노부카쓰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상의하지 않고 강화를 받아들이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싸울 이유를 잃었고, 고마키·나가쿠테 전투는 끝납니다.

농민의 아들이 천하통일을 이루다

천하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본거지가 된 오사카성
천하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본거지가 된 오사카성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 다툼이 진정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시코쿠, 기이(현재의 와카야마현과 미에현 남부), 엣추(현재의 도야마현)를 평정합니다.

영지뿐 아니라 정권까지 장악하기 위해 조정과 관계를 맺고, 공가 최고위직인 간파쿠에 오를 자격이 있는 고노에 가문의 양자가 된 뒤 천황에게 간파쿠로 임명됩니다.
간파쿠에 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권위를 바탕으로 규슈를 평정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이코 토지 조사와 도검 몰수령 등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정책도 시행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시행한 정책 중 하나인 소부지령은 다이묘 간의 사적인 전쟁을 금지했습니다.
금지된 사적 전쟁을 일으킨 호조 가문은 멸망했고 끝까지 저항하던 구노헤 마사자네도 항복하면서, 농민의 아들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한평생 만에 천하통일을 이뤘습니다.

조선 침략

오대로의 수장으로 임명된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대로의 수장으로 임명된 도쿠가와 이에야스

천하통일 후에는 중국 진출을 목표로 삼아 그 발판으로 조선을 여러 차례 침략합니다.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뒤를 이을 친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태어납니다.

중국 진출을 시도하는 한편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깨달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가신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 모리 데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를 불러 모읍니다.
그리고 자신이 죽은 뒤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보좌할 오대로로 이들을 임명했습니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병으로 사망합니다.
※사인에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오대로의 수장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을 장악하고 에도 막부를 세운 사실은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명언

다른 역사적 위인들과 마찬가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많은 명언을 남겼습니다.

그중에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생애를 잘 보여 주는 명언은
“꿈은 클수록 좋다고 하지만, 나는 당장 손이 닿을 수 있는 일을 말하고 있다”
가 아닐까요?

농민으로 태어나 한평생 만에 공가 최고위직인 간파쿠가 되고 천하를 통일한 위인의 말이라고 하기에는 놀라울 만큼 현실적이지 않나요?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문가 출신도, 무가 출신도 아닌 농민 출신이었습니다.
가문이나 환경을 활용해 단숨에 출세할 수 없는 태생이었기에 눈앞의 작은 꿈을 하나씩 이루며 농민에서 가신으로, 가신에서 무사와 무장으로 성장했고, 끝내 공가 최고위직인 간파쿠까지 올라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말이라 더욱 무게감이 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남긴 명언은 이 밖에도 많으니 관심이 있다면 꼭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일화

명언과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일화를 소개합니다.

별명은 ‘원숭이’, ‘대머리 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별명은 단순한 욕설처럼 느껴질 만큼 심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얼굴이 ‘원숭이’를 닮아 ‘원숭이’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원숭이’도 심한 별명이지만 더 심한 별명으로 부른 사람은 오다 노부나가였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외도로 고민하던 아내 네네에게 상담을 받은 오다 노부나가는 네네에게 보낸 격려 편지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대머리 쥐’라고 불렀습니다.

수공의 달인

수많은 성을 함락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장 잘했던 전술은 ‘수공’입니다.
수공은 성 주변에 제방을 쌓고 그 안으로 물을 흘려 성을 물에 잠기게 한 뒤 상대를 항복시키는 전술입니다.

일본 3대 수공으로 불리는 ‘빗추 다카마쓰성 전투’, ‘오타성 전투’, ‘오시성 전투’ 모두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관여했습니다.
이 사실만 보아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수공에 얼마나 능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일본 3대 수공은 규모가 놀라울 정도로 컸으니 관심이 있다면 꼭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아첨의 달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른 전국시대 무장들과 마찬가지로 이름을 여러 차례 바꿨습니다.

어릴 때의 이름인 히요시마루를 시작으로 도키치로, 기노시타 도키치로, 하시바 히데요시, 다이라노 히데요시, 후지와라노 히데요시를 거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되었습니다.

‘하시바 히데요시’라는 이름은 오다 노부나가의 중신인 시바타 가쓰이에와 니와 나가히데의 이름에서 ‘시바’와 ‘하’를 따서 스스로 지은 것입니다.

일설에 따르면 이는 중신인 시바타 가쓰이에와 니와 나가히데의 환심을 사기 위한 ‘아첨’이었다고도 합니다.

동료들에게 ‘아첨꾼’이라는 욕을 듣기도 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지만 훗날 천하통일까지 이뤘으니, 아첨도 출세를 위한 훌륭한 수단이었던 셈입니다.

측실이 300명 이상이었던 호색한?

50세가 넘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는 측실이 300명 이상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나 모은 것이 아니라 명문가 출신이거나 미인이어야 측실로 삼았던 듯합니다.

명문가 여성을 골랐던 이유는 자신이 농민 출신이라는 콤플렉스와 자신의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아무리 여성을 좋아했다고 해도 측실이 300명 이상이었다니 상상을 초월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인연이 있는 건축물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인연이 있는 건축물은 오늘날 일본에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주고쿠 지방 공략의 거점이 된 히메지성

오다 노부나가의 명을 받아 주고쿠 지방을 공략할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거점으로 삼은 곳은 히메지성이었습니다.
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여러 곳을 개수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세계유산에도 등재된 일본 최고의 명성입니다.

세계유산에 등재된 일본을 대표하는 성곽 건축물로, 별명은 ‘백로성’입니다
세계유산에 등재된 일본을 대표하는 성곽 건축물로, 별명은 ‘백로성’입니다

10만 대군과 함께 입성한 국보 이누야마성

‘고마키·나가쿠테 전투’가 시작될 당시 이누야마성은 오다 노부카쓰군의 성이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군에 함락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입성했습니다.

국보로 지정된 이누야마성에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천수각이 있습니다.
국보 5성 중 하나로 손꼽히는 명성이므로 성을 좋아한다면 꼭 방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국보 5성 중 하나로, 고풍스러운 목조 천수각을 갖추고 절벽 위에 세워진 성입니다
국보 5성 중 하나로, 고풍스러운 목조 천수각을 갖추고 절벽 위에 세워진 성입니다

천하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축성한 오사카성

천하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사카를 본거지로 정하고 오사카성을 건설했습니다.
완공까지 15년이 걸린 오사카성은 현재 남아 있는 성의 4~5배 규모였다고 합니다.
또한 혼마루 중앙에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천수각이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대규모로 지어진 화려한 성이었지만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도쿠가와 막부가 재건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축성한 성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현재 내부는 역사 자료관으로 운영되며 오사카의 유명 관광 명소이기도 합니다.

오사카 시민들의 기부로 재건되었으며, 현재는 박물관으로서 상설전과 기획전 등을 개최합니다
오사카 시민들의 기부로 재건되었으며, 현재는 박물관으로서 상설전과 기획전 등을 개최합니다

사진

  • 한평생 만에 정상에 오른 일본 최고의 출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한평생 만에 정상에 오른 일본 최고의 출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 히데요시가 가신으로 섬긴 오다 노부나가

    히데요시가 가신으로 섬긴 오다 노부나가

  • 승승장구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이미지

    승승장구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이미지

  • 주고쿠 대회군의 행군 이미지

    주고쿠 대회군의 행군 이미지

  •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정하는 기요스 회의가 열린 기요스성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정하는 기요스 회의가 열린 기요스성

  • 천하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본거지가 된 오사카성

    천하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본거지가 된 오사카성

  • 오대로의 수장으로 임명된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대로의 수장으로 임명된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요토미 히데요시 프로필

이름
도요토미 히데요시
출생 연도
1537년
사망 연도
1598년
향년
61세
출생지
오와리국(현재의 아이치현)